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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 | 안국선원 ‘스리랑카 불교성지순례’ 동행취재...불교신문 11/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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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관리자 작성일11-03-07 10:54 조회2,57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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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론나루와 불교유적을 대표하는 갈 비하라(삼존불) 사원. 맨 오른쪽이 부처님 열반상이다.
 

  
(재)대한불교조계종 안국선원은 지난 2월21일부터 3월1일까지 8박9일간 ‘부처님의 발자취를 찾아서’라는 주제로 스리랑카 불교성지순례를 진행했다. 선원장 수불스님(본지 사장)과 부산 안국선원 신도 등 100여명의 대중은 이번 순례를 통해 부처님이 세 번째 왕림해 설법한 곳으로 알려진 라자마하 비히라 사원을 시작으로 부처님의 모발사리가 봉안된 마하세야탑, 스리랑카 최초의 사원인 이수루무니아 사원 등 불교성지를 눈으로 확인하고 마음으로 되새기는 뜻 깊은 시간을 가졌다. 성지순례를 주관한 명문여행사(사장 김주환)와 현지 안내를 맡은 로얄 인더스(대표 단정석)의 프로그램에 따라 주요 유적지를 돌아봤다.
 

 



잠시 비워두었던 집을 보듯 주인이 되고 …

 

열반상 앞에서는 아난의 마음을 생각하다

 



첫 일정은 도착지인 콜롬보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서 시작됐다. 부처님이 세 번째 왕림해 설법했다는 라자마하 비하라 사원에 이은 스리랑카 조계종복지타운 방문<본지 제2699호 5면>으로 의미를 더했다.

2500여 년 전 부처님의 발자취 찾아나서는 동시에 해일 피해로 고통을 겪은 스리랑카 주민들을 보살피기 위해 조계종이 직접 건립, 운영하고 있는 시설을 방문해 고통을 함께 나누며 세계 속의 한국불교의 역할을 함께 고민해보는 시간을 가진 것이다.

<사진설명> 본격적인 성지순례에 앞서 본지 사장 수불스님이 스리랑카 조계종복지타운 어린이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부처님 3차 왕림지 ‘라자마하비하라’ <위 사진>

켈라니아 강변에 위치한 켈라니아 사원은 스리랑카 불교에 있어 가장 중요한 성지중의 하나로 꼽힌다. 현지어로는 ‘라자마하비하라’. ‘위대한 왕의 사원’ 이란 뜻으로. 이곳 사람들은 2500년 전 부처님께서 홀연히 스리랑카에 와 불법(佛法)을 설했다고 한다.

19세기 복원된 것으로 하얀색 탑은 부처님께서 앉아서 설법한 곳이며 법당 안에는 부처님의 전생이야기 자타카, 보살상들이 그려져 있고, 본당 내에는 편안히 휴식을 취하고 있는 와불(臥佛)이 있다. 그 외 힌두교의 신상들도 같이 그려져 있는데 이는 민중 속에서 함께하는 힌두와 불교의 공존을 의미한다.

스리랑카에 전래되는 일부 경전에는 부처님께서 인도에서 스리랑카로 세 번 오신 것으로 아주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다고 한다. 두 번은 설법을, 한 번은 명상을 하고 족석을 남겼다는 것. 하지만 이런 그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 가르침은 스리랑카에 영구적으로 지속되지 못했다. 그러다 기원전 247년 전륜성왕으로 불리는 아쇼카왕의 아들인 마힌다에 의해 다시 불교가 전해지고, 그 당시 수도였던 아누라다푸라의 데바남피사 팃샤 대왕으로부터 정식으로 불교가 국교화됐다.

스리랑카는 불교사에 있어 가장 보물 같은 존재이다. 인도 본토에서 불교가 발생했으나 실존하지 않는 게 현실이고, 상좌부(소승 정통) 불교는 스리랑카로 부터 주변 미얀마, 태국, 라오스, 캄보디아로 전해졌다. 이런 점에서 부처님 입멸 후 가장 정통의 불교가 남겨진 사실상의 고대 불교의 중심은 바로 스리랑카라는 것이다.

 


 <사진> 주변에 수많은 코끼리 조각이 새겨져 있는 르완웰리 대탑.


대표적인 불교 유적 10여 가지만 살펴봐도 그 가치를 짐작할 하다. △부처님께서 최초로 스리랑카에 오셔서 불교를 전한 곳으로 알려진 마히양가나 마하 다고바 △부처님께서 두 번째 방문하여 족석을 남기신 곳 스리파다(불족산) △부처님께서 3번째 켈라니아왕의 요청으로 오셔서 법을 전하신 켈라니아 마하라자 비하라 사원 △스리랑카 상좌부 불교가 최초로 전해진 미힌탈레 △성스러운 보리수가 현존하는 아누라다푸라의 스리마하 보리수 사원 △(팔리어로 전승)삼장이 최초로 문헌화한 장소 알루비하라(최고의 성지) △대사파, 무외산사파(대승), 기다림사파 등 스리랑카 3대 종파의 유적지 아누라다푸라 △중세 불교학의 요람 폴론나루와 △호국(護國) 불심으로 조성했다는 석굴사원 유적지 담불라 석굴군 △불교, 힌두교, 이슬람교를 통틀어 최고의 공통의 성지로 불리는 카타라가마 신전 △석가모니 부처님의 치아사리가 봉안된 캔디의 불치사. 이 외에도 무수히 많은 유적이 있다.

 

 <사진> 아쇼카왕의 아들 마힌다 장로의 법구가 안치된 암바스탈라 뒤로 부처님 모발 사리가 봉안된 마하세야탑이 보인다.

부처님 모발 사리탑 마하세야

아쇼카와의 아들 마힌다스님에 의해 스리랑카에 최초로 불교가 전해진 장소는 미힌탈레. 마힌다스님의 이름을 따서 만들었다. 마하비하라에서 마하세야 탑으로 오르는 계단 옆에는 마힌다스님이 처음 왕에게 설법할 때 앉았던 돌 의자와 스님의 유골이 봉안된 암바스탈라탑도 있다. 스님이 머물렀던 석굴도 나온다. 가장 높은 곳의 하얀색 탑은 마하세야 다고바로 불리는데 이 탑엔 석가모니 부처님의 머리카락 사리가 봉안돼 있다.

 

 

<사진> 수령 2000년 보리수(왼쪽 작은 가지).

 



스리랑카 최초 사원 이수루무니아  <위 사진>

스리랑카 최초의 정사(精舍)가 이수루무니아 사원이다. 바위를 파낸 듯이 지어진 불당과 바위 위에 세운 탑, 밝은 색으로 칠해진 불상을 모신 본당, 귀중한 발굴물을 보관하는 보물관은 아누라다푸라의 어떤 유적과도 다른 이색적인 풍취를 느낄 수 있는 사원이다.

이수루무니야 정사에서 북쪽으로 약 1.2km지점에 아누라다푸라가 불교의 성지라는 사실을 더욱 강하게 인식시켜 주는 보리수가 있다. 기원전 3세기에 인도 아쇼카 왕의 딸 상가밋타가 인도 부다가야의 보리수 가지를 가져와서 당시 데바남피야 팃사 왕이 심은 것이라고 전해진다. 수령이 2000년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잎은 푸르고 무성하지만 가늘다.

 

 

 <사진> 바닥이 둥근 모양의 바타다게 불당.

쿼터랭글과 삼존불 사원

궁전 북쪽 일대에 펼쳐져 있으며, 싱하리 왕조 때는 불치사가 있던 지역이다. 거의 원형을 보존하고 있는 투파라마는 불당으로 사용되던 곳으로 옛 싱하리 양식으로 지어졌다. 벽돌 건물은 힌두교의 영향을 받았으며, 내부에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여러 모습이 그려져 있다. 투파라마 북동쪽에는 둥근 바타다게 불당이 서 있다. 도로에서 2m 정도 높은 곳에 서 있는 아름다운 건물은 폴로나루와에서 가장 예술적인 건물로 꼽힌다. 네 군데 위치한 입구 계단 앞에는 반월석과 가드 스톤이 있고, 계단을 올라가면 네 군데에 모두 좌불상이 있다. 불당 건너편에 불치사의 유적인 하타다게가 있다.

쿼드랭글에서 북쪽으로 4㎞ 정도 되는 곳에 폴론나루와 불교유적을 대표하는 갈 비하라(삼존불) 사원이 있다. 길다란 바위산에 각기 다른 모양의 불상을 조각해 놓은 사원으로 싱할라인들의 발달된 돌 조각기술의 정수가 담긴 곳이다. 왼쪽의 좌불은 선정중인 부처님을 묘사한 것, 그 우측에는 석굴암처럼 작은 석굴을 조성하여 선정중인 불상을 봉안했다, 오른쪽 불상은 부처님께서 쿠시나가르에서 열반하신 장면을 묘사한 열반상이다. 베개를 잘 보면 둥근 태양을 상징하는 문양이 조각되어 있다. 석굴과 열반상 사이이 입상은 스승을 잃고 슬퍼하는 아난의 모습으로 보는 이들의 마음을 숙연케 한다. 삼존불 전체 조형은 거대한 와불의 모습과 흡사하며 큰 국난이 있을 때 눈물을 보여 나라의 슬픔을 같이 했다고 전해진다.

 



최대 석굴사원 담불라  <위 사진>

기원전 1세기경에 건조된 동굴 사원으로 현지인들이 담블라가라라고 부르는 높이 약 180m의 바위산의 중턱에 있다.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동굴을 따라 복도가 있고 5개의 동굴이 나란히 있다. 인도의 아잔타처럼 동굴을 파내고 만든 것이 아니라 자연 동굴에 스님들이 머무르면서 고쳐나간 것으로 추정된다.

제1동굴 (데바 라자 비하라 Deva Raja Vihara)의 이름은 신들의 왕의 절 이란 의미. 가장 오래된 석굴인데, 이 사원 최대의 불상인 열반불이 있다. 제2동굴 (마하 라자 비하라 Maha Raja Vihara)은 위대한 왕의 절. 담불라 최대의 동굴이다. 폭이 약 52m, 깊이가 25m, 높이는 입구 부분이 약 6m이고 안으로 들어 갈수록 점점 낮아진다. 동굴 안에는 56개의 불상이 모셔져 있으나 이곳에서 볼 만한 것은 벽과 천장에 그려진 벽화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생애 이외에 스리랑카의 역사도 그려져 있다. 제3동굴(마하 알트 비하라) 이름의 뜻은 위대한 새로운 절. 길이 9m의 와불을 비롯하여 도합 57개의 불상이 있다. 제4동굴(파스시마 비하라) 이름의 의미는 서쪽의 절로 좌상이 많다. 제5동굴 1915년에 지어진 가장 새로운 절이다.



팔리어 삼장 문헌화 한 알루비하라

알루 비하라는 찬란한 빛의 사원 이란 뜻. 이름대로 그 숭고한 빛 즉 부처님 말씀의 문헌화가 이루어진 성스러운 사원이다. 세계의 석학들이 그토록 찬사를 보냈고, 인류 최고의 문화유산으로 꼽은 팔리어 삼장의 문헌화는, 기원전 1세기 인도에서 건너온 당대 팔리어 최고의 석학으로 불렸던 부다고사 스님에 의해서였다. 부다고사 스님은 인도에서 스리랑카로 건너온 후 이곳 알루비하라의 작은 석굴에 머물면서 팔리어 삼장의 간경 작업을 시작했다고 한다. 일명 ‘패엽경’으로 불리는 팔리경전의 간경작업은 야자잎을 쪄서 바르게 편 후 말리고, 그것에 유연성을 주기 위해 무두질을 한다. 그러고 나서 적당 크기로 자른 후 철핀으로 경을 써 내려 간다. 그리고 나서 잉크를 입히면 비로소 경전이 완성된다. 당시의 방대한 경율논 삼장의 분량을 감안 할 때 적어도 수십명이 수십년간 이 일을 진행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알루비하라 사원은 팔리어 삼장의 간경이 이루어진 후 많은 후학들이 이곳을 지키면서 자연 발생적으로 생겨난 사원이다. 현재 알루비하라엔 부다고사 스님이 머물렀던 석굴과, 몇 개의 다고바, 그리고 와불이 모셔진 두 개의 석굴사원이 남아 있다.

 

 



스리랑카 대표하는 사원 불치사 <위 사진>

캔디 호반의 차분한 풍취를 보여 주고 있는 불치사는 스리랑카를 대표하는 불교 사원이다. 사원 내부에는 크리스탈 바위를 깎아 만든 석가모니 부처님의 좌상, 정밀한 조각이 새겨진 돌문, 옅은 감색의 화려한 당초 모양으로 만들어진 천장 등이 차분한 사원 내부 풍경과 잘 어울린다. 사원 안에 봉안되어 있는 부처님 치아사리는 기원전 543년 인도에서 부처님 다비 때 입수한 것이라고 한다. 그 후 4세기에 인도의 오릿사주 카링가 왕자가 머리카락 속에 감춰 실론에 들어와 아누라다푸라에 봉납했다고 한다. 그 뒤로 수도를 옮길 때마다 불치(佛齒)도 함께 이동했으며 마지막에 보관한 곳이 이곳 캔디 불치사다.

사원은 새벽부터 황혼 무렵까지 개방되어 있어 참배가 자유롭지만 불치가 있는 방문이 열리는 것은 하루에 세 번 푸쟈(공양) 때다. 이때는 스리랑카 각지에서 모여든 참배객으로 원내가 북적거린다. 악기소리와 더불어 공손히 공물을 바치는 의식이 행해지고, 진지한 기도가 이어진다. 불치(佛齒) 실물이 공개되는 일은 극히 드물다. 실제로 볼 수 있는 것은 작은 탑 모양을 한 보석으로 장식된 화려한 금제 상자로 일곱 겹으로 되어 있고 그 안에 불치가 있다. 실물이 공개될 때는 금으로 만든 연꽃 모양의 접시 위에 놓여진다고 한다.

스리랑카 아누라다프라ㆍ플론나루와ㆍ 담블라ㆍ캔디=김선두 기자 sdkim25@ibulgyo.com

 

 <사진> 힌두교, 이슬람교를 통털어 최고로 꼽히는 카타라가마 신전. .

 

 

 

■ 오래 기억될 성지순례

 좌선과 뜻깊은 법문

‘스토리텔링식’ 안내
 
주먹 크기나 될까? 원숭이 한 마리가 좌선에 들려는 대중들 앞을 지나간다. 행여나 입정 대중에게 방해될까 싶어 원숭이를 �아 보내려는 가이드의 손짓을 오히려 스님이 제지한다. 부처님 모발사리탑을 세 번 돌고 나서 앉은 사리탑 그늘. 이 곳 보다 더 적요한 선방이 있을까? 대중들이 입정하는 순간 그 많던 순례객은 다 어디로 갔을까. 숨소리조차 느낄 수 없었다. 성지 관리인들의 목소리마저 대중 속으로 빨려 들어간 듯 모발사리탑 주변은 순간 하나가 된다. 들리는 것은 오직 고도를 감도는 바람 그리고 맑고 맑은 새소리. 이렇게 대중들은 순례 도중 주인공이 되어 2500여년을 오가듯 좌선을 즐긴다. 바타다게 원형불당 건너편 하타다게 그늘도 불치사 법당도 대중들에겐 훌륭한 선방이다.

“편안하십니까?” 스님은 갈비하라 삼존불을 친견하고. 부처님 열반상을 바라보고 앉은 신도들에게 법문을 했다. 스리랑카 불교의 침체에 대한 안타까움 때문인가? 부처님의 열반을 보며 드러내 놓고 슬퍼하지 못하고 돌아서 눈물짓는 아난 존자의 모습을 묘사하는 법문은 석양에 더 빛을 발했다.

‘신밧드’와 ‘세리’라는 가상의 도우미를 등장시켜 경전과 설화를 근거로 한 스토리텔링 방식의 성지순례 안내, 좌선과 법문, 나눔과 보시가 이어진 8박9일의 성지순례는 또 한편의 정진이었다. 




 

■ 난다스님이 말하는 ‘스리랑카 불교의 어제와 오늘’



  팔리어 ‘삼장.주석’ 기록
 
  세계 최초 패엽경 ‘문헌화’
           
  1956년=불기2500년 공인

      
             
  난다스님 / 알루비하라 사원 주지


기원전 3세기 데와남피야티싸왕 시대(BC 247~207), 인도 아쇼카왕의 아들인 마힌다 장로에 의해 스리랑카에 불교가 전래됐다. 불교가 되자마자 왕권과 밀접한 상호협조와 우호관계를 맺고 국교가 되어 발전해 왔다.

하지만 기원전 1세기에 이르러 왓타가미니 아바야왕 시대(BC 43~29) 남인도 타밀인들의 침략과 전쟁 속에서 교(敎)와 선(禪)을 바탕으로 한 불교교단에 변화가 시작됐다. 그때까지 불교의 중심지였던 대사의 승단과 왕실의 관계가 멀어지면서 왕은 마하티싸스님에게 아바야기리 사원을 건립하여 하사하고 그 이후로 최초의 승단분열이 일어났다.

스리랑카 불교 최초의 승단분열과 더불어 6년이나 되는 가뭄과 기근 때문에 수많은 스님들과 함께 사람들이 사망했다. 일부 스님들은 인도로 피난을 떠났고, 또 다른 일부는 불교의 보호를 위해 끝까지 남아 구전(口傳)으로 내려온 불법(佛法)을 지키는데 온 힘을 쏟았다. 재난 이후 500여 명의 암송자들이 마탈레 알루비하라 동굴사원에서 열린 ‘경전 사경결집대회’를 통해 구전되어 오던 팔리어 삼장과 주석을 패엽에 기록함으로써 세계 최초의 팔리어 삼장을 완성시켰다.

하지만 그 이후 불교교단의 근본은 교학인가? 수행인가? 하는 문제로 또 다른 승단이 두 개가 생기면서 스리랑카 전통승가에 큰 변화가 시작됐다. 그 두 가지 승단은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오는데 시대별로 경전연구 수행 전통의 ‘간타두라’와 위파사나 수행 전통의 ‘위파사나두라’ 또는 마을에서 신도들과 함께 거주하는 ‘가마와시’와 수행 중심으로 숲에 거주하는 ‘와나와시(아란냐와시)라 불린다. 이 양 승단에 스님들은 아누라다푸라, 폴론나루와, 담바대니야, 쿠루내갈라, 감폴라, 콧테, 시타와카, 캔디 지역 등 시대를 걸치면서 스리랑카의 불교발전뿐만 아니라 문화 문명(불교문학) 발전에 의해 힘을 다 했다.

1505년 포르투갈의 침략에 이어 네덜란드와 영국으로부터 해방되는 1948년까지 443년의 긴 세월동안 스리랑카의 승가는 식민지 세력 속에서 살아가야만 했다. 식민지 상황 속에서 시얌종이 1753년 태국에 의해, 아마라푸라종(1772)과 라만냐종(1864)은 태국과 미얀마에 의해 설립됐다.

1956(불기 2500)년 부처님오신날 기념 대법회에서 불기(佛紀)가 세계 불기로 인정됐으며 매월 보름날은 공휴일로 지정됐다.

오는 5월 부처님오신날을 맞이하여 각국불교 대표자들이 스리랑카에서 삼붓다트와 자얀티 라는 대규모 행사를 개최한다. 이 행사에서는 세계불교 발전을 위해 몇 가지 중대한 안건을 함께 논의할 것으로 보여 주목된다. △상좌부 불교와 대승불교의 이해 △다문화 가족과 여러 종교를 이해하면서 강제로 개종하지 못하게 하는 것 △계율과 불자의 행동에 관한 문제(출가자+재가자) 등이다.

또한 스리랑카에서는 앞으로 일요일 불교학교를 싱할리어, 타밀어, 영어(일요 법학교=다함파셀라) 등 다양한 언어로 운영하는 것을 비롯해 각 지역의 사원에서 마을마다 가난한 이에게 집 한 채 지어 주기, 캔디 불치사의 세계불교박물관 개원식, 대규모 어린이 출가식, 부처님 일대기 영화 촬영 등이 계획되거나 진행 중이어서 불교가 스리랑카뿐만 아니라 세계 속의 불교 중심지로 주목받을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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