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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 | [인도불교연구]인도에서 불교가 자취를 감춘 이유는? (출처:http://cafe.daum.net/AdConversion/HC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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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관리자 작성일09-07-20 23:39 조회2,04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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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에서 불교는 왜 쇠멸하였는가?

 

유대인들은 스스로 기독교를 인정하지 않아 기독교가 소아시아에서 번성했고 로마로 들어가 오늘날의 규모로 성장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유대인들은 기독교를 인정하지 않고 있고 앞으로도 인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도에서의 불교는 인도인들이 불교를 인정해 대 번성하다가 어느 순간엔가 한국 동남아
일본 등 동아시아에는 번성했으나 정작 인도내에서는 거의 사라졌습니다.
그렇다고 인도인들이 불교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아직도 부처님 상을 곳곳에서 볼수 있고 섬기고는 있으나 힌두교의 하나로 통합된 듯이
보여지고 불교 고유의 사상이나 전례는 아소카왕 이래로 살아나지 않고 있습니다.

바로 이 부분.......

불교가 인정받은 땅에서 왜 불교가 사라졌는가 입니다.

이 재밋는 부분을 파헤져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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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불교란 현재 인도에서 진행되고 있는 불교의 양상을 포함하는 개념이 아니라, 부처님 이후 이슬람교의 침입 이전까지 인도에 있었던 불교를 가리키는 개념으로 쓰이는 것이 보통이다. 이슬람교도의 침입을 받은 이후 인도에서는 불교가 이미 종교로서의 독립성을 상실했고 실제로 신봉자가 없다고 확인되기 때문이다. 20세기에 들어서서 인도에 있었던 일부의 불교부흥운동은 별개의 문제이다. 이 부흥운동은 스리랑카의 유명한 종교인인 다르마팔라와 독립 이후 인도의 초대 법무장관을 지낸 암베드카르에 의해 각각 주도되었으나, 그 성격은 판이하다. 다르마팔라는 19세시 말엽에서 20세기 초엽에 걸쳐 스리랑카와 인도에서 불교부흥운동을 전개하였으나, 이 운동은 문화운동으로서의 성격을 크게 탈피하지 못했다. 그의 업적은 현재 대보리회(大菩提會, The Maha Bodhi Society)라는 조직과 여기서 설립하고 발행한 사원 및 기관지로서 남아 있다.

한편 1953년 이후 짧은 기간 진행된 암베드카르의 부흥운동은 불교 자체의 부흥이라기보다는 불교를 통해 천민들의 사회적 지위를 개혁하고자 했던 사회운동의 일환이었다는 한계점을 지닌다. 어쨌든 우리가 통상 말하는 인도불교는 이러한 근래의 움직임까지는 포함하지 않는다. 따라서 인도불교는 인도에 남아 있는 유적이나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는 문헌을 통해 드러나는 것이다.

불교가 그 발생지인 인도에서는 종적을 감추고 외국에서는 찬란한 발전을 이루었다는 사실이 불가사의로 느껴지지 않을 수 없다. 더욱이 150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온갖 기틀을 마련해 왔던 것이다. 인도에서 불교가 쇠멸한 이유를 한결같이 이슬람교도의 침입이라고 들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불교를 멸망시킨 결정적인 외적요인인 것은 분명하지만, 이미 불교 자체 내에 자기 붕괴를 초래할 내적요인이 있었을 것이라는 것이 일치된 견해이다. 즉 학문연구를 핵심으로 한 불교의 전통은 그 학문을 뒷받침하는 광장으로서의 사원과 인재를 잃을 때 이미 존재의 실체를 상실해 버린 것이라고 하며, 대략 12, 13세기를 정점으로 하는 이슬람교도와 불교박해가 드디어 인도불교의 종말을 분명한 형태로 매듭짓고 말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내적요인은 불교가 그 존재의 실체를 상실하게 된 배경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먼저 외적요인인 이슬람교의 침입에 의해서 인도불교는 10세기 무렵에 사라졌을 것이라고 일반적으로 믿어져 왔다. 그런데 다행히 이슬람교 침입 당시의 불교 상황을 어느 정도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자료가 티베트의 한 사원에서 발견됨으로써, 적어도 13세기까지는 인도에 불교가 존속하고 있었음이 밝혀지게 되었다. 인도 이름으로 다르마스와민(Dharmasvamin)이라고 불린 티베트의 순례승이 1224년에서 1246까지 인도에서 스행하였는데, 그의 전기가 발견된 것이다. 그는 유명한 날란다(Nalanda)대학과 같은 인도불교의 중심지를 여행하였다. 그의 전기에는 이슬람교도의 박해에 떠는 승려들의 모습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예를 들면, 보드가야의 마하보디원에서는 비구들이 모두 도망쳐 버리고, 최후로 남은 4인의 비구가 불상을 안치한 예불당 입구를 벽돌로 막아 출입문도 없앤 채 그 안에 피신하여, 이슬람병사가 떠난 다음인 17일 후에야 비로소 정상을 되찾았다고 전한다. 또 한때 2만 명가량의 승려들이 수학했던 곳으로 유명한 날란다승원에는 당시 약 70명의 승려가 승원장 밑에서 공부하고 있었음도 전하고 있다.

인도에 침입한 이슬람교도는 아프가니스탄의 투르크 계통으로서, 통치자인 마흐무드는 1001년에서 1027년까지 17회에 걸쳐 북 인도에 원정하였다고 한다. 그의 원정은 이슬람교도의 개종과 노예물자의 약탈이 주된 목적이었으므로 점령지를 오랫동안 지배하지는 않았지만, 불교나 힌두교의 사원과 성지를 파괴하고 보물을 약탈했으며 승려를 학살하는 등 세계 역사상 유래가 없을 정도의 참극을 자행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후계자들은 침입을 계속하여, 1206년에는 델리에 소위 노예왕조라는 최초의 이슬람교 왕조가 성립되었다.

그러나 인도불교의 멸망은 단순히 이 같은 외적요인에 의한 것만은 아니다. 심각한 내적요인도 있었다. 같은 박해를 받았던 힌두교는 살아남았던 점을 예로 들 수 있다. 그래서 오히려 그 근본적인 원인은 불교 자체의 내부에서 찾아야 할 것이라고 본다. 사실 불교는 부처님 이래 항상 정통종교인 브라만교에 대한 비판자였다.

그러나 불교의 세력이 가장 왕성했을 때에도 불교는 정통임을 자처하는 브라만교를 완전히 압도하지는 못했으며, 브라만교가 힌두교로 부흥함에 따라 불교는 점차 힌두화 되어 마침내는 본질적으로 구분하기가 불가능할 정도로 융합한 탄트라불교(제37문 참조)의 성립을 보기에 이른다. 다시 말해서 불교가 멸망하는데 결정적인 타격을 준 것은 이슬람교이지만, 그 이전에 이미 불교는 힌두교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고 할 수 있다.

제37문에서도 설명했듯이 힌두교와 불교의 융합은 밀교로 나타났지만, 그 이전에 조성된 석굴사원의 많은 조각품에서도 불교가 힌두세계로 흡수되어 가는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불교는 처음부터 인도의 뿌리 깊은 계급제도인 사성(四性)의 차별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였지만, 그 스스로는 당시의 사회를 개혁코자 하는 실천운동으로까지는 나아가지 못했으며, 결국 그 사회체제 속으로 편입될 수밖에 없었다.

3세기만 하더라도 계급제도를 통렬히 비판하고 인간의 평등을 논리적으로 입증한 [금강침론(金剛針論)]이라는 문헌이 불교측으로부터 작성되었지만, 이후에는 그러한 문헌마저도 다시 등장하지 않는다. 그 문헌 자체가 불교에 대한 당시 사회의 도전이 거셌음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학문에 치중하여 실천성을 상실해 가고 있던 불교는 그러한 도전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했던 것으로 간주된다. 그리하여 아잔타의 석굴사원에 있는 보살상처럼 7세기 이후의 많은 보살상들이 제1계급인 브라만임을 표시하고 있다. 즉 보살에 브라만의 권위를 부여하려 했던 것이다. 또 이 시대의 대승불전은 “부처님은 고귀한 가문의 출신이다.”라고 단언하였고, 계급제도가 오히려 당연한 것으로서 수용되기에 이른다. 실로 불교는 애매한 입장에 처하게 되었다. 이론적으로는 대승을 표방했음에도 여전히 출세간적 입장에서 관념되어 가고, 실천적으로 유신론적 경향의 신앙을 강조했던 대승의 입장이 갈수록 세속화되어 힌두교의 색채를 띠기에 이른다.

인도불교 후기의 상황을 보면, 불교는 힌두세계 속의 한 분파인양 존재하고 있다. 따라서 불교는 힌두세계 속에서 이단시될 필요가 없었고, 나중에 힌두교 측에서는 부처님이 자신들이 신봉하는 비슈누신의 권화(權化)라고 믿기에 이르렀다. 8~12세기의 불교 측 자료에 의하면 계급화 된 불교인의집단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 그렇다고 하여 힌두교 사회 밖에서 독자적으로 존재한 불교인의 집단도 없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이전의 상황에서도 불교인은 응집력 있는 단일한 사회집단을 구성한 것 같지는 않다. 이런 점에서 불교는 당시의 자이나교와는 현저한 차이를 보여 주고 있다. 이 시대에는 자이나교도 힌두교의 신들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이나교단의 응집력은 매우 견고해서, 재가신자들은 독자적인 계율의 의무사항을 지키고 의례도 확립하고 있었다. 따라서 사회적으로도 실체가 확실한 단일 집단으로서의 응집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소승과 대승의 구별도 희박했으며, 날란다대학 같은 곳에서도 불교 이외의 힌두교 계통의 학문도 연구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나마 마지막 보루였던 승원들이 이슬람교의 세력에 의해 파괴되자, 불교는 더 이상 재생할 수 있는 힘마저 완전히 상실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후 인도불교는 힌두교의 세계 속으로 흡수되어 그 모습을 감추기에 이른다. 현재 인도에서 부처님은 힌두교의 한 신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 이 같은 결과를 초래하게 된 원인은 무엇인가? 이에 대해서는 확실한 해명이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인도 대승불교의 사회성의 결여일 것이다. 승려들은 풍부한 재정적 후원에 힘입어 승원에 안주하면서 학문에만 전념했다. 뿐만 아니라 철저한 수행의 자세도 보여 주지 않았던 것 같다. 대승불교의 이타적(利他的) 이념이 구호에 그쳤던 것이다. 아무리 좋은 이념도 행동으로 실천되지 않을 때, 그것은 공허할 수밖에 없다. 관념이나 말로만의 실천, 그것이 인도불교를 쇠멸케 한 근본원이라 결론지을 수 있을 것이다.


정승석 지음

민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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