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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 | 제5회 한중일 문화교류대회 현장...불교신문 09. 10.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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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관리자 작성일09-10-19 15:43 조회2,04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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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천년고찰 대명사에서 열린 세계평화.화해를 기원하는 한중일 불교도 법회에서 나란히 선 각국 대표들.

 

동북아 3국 한국 중국 일본이 문화를 통한 교류에 발 벗고 나섰다. 한중일 3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및 종교계 인사들은 지난 14일부터 17일까지 중국 강소성 양줘우(揚洲)시에서 ‘평화로운 동북아, 평화로운 세계’를 주제로 각종 문화제와 포럼을 개최했다.

 

‘평화로운 동북아’ 주제…문화제와 포럼

 10월14~17일, 中 양줘우시 주최로 열려

“불교로 세계평화 초석 되겠다” 선언 채택

 

이번 행사는 중국 양줘우시가 주최했다. 양줘우는 한국과 일본 불교, 문화계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과 직접적 연관을 맺고 있어 삼국 문화 교류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지방이다. 한국은 신라말 대유학자이며 불교사상에 많은 영향을 끼친 최치원, 일본은 일본 불교의 시원으로 불리는 감진선사가 양줘우와 연관을 맺고 있다. 당나라 말 반란을 일으킨 황소를 글 한편으로 굴복시킨, 그 유명한 <토황소격문>을 쓴 최치원은 4년간 양줘우에서 관리를 역임했다. 감진선사는 일본 불교의 시조로 불리는 인물이다. 중국 당나라 때 양줘우에서 태어난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기 위해 다섯 번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도일(渡日)에 성공해 일본에서 불교를 전파했다.

오랫동안 잊혀졌던 두 인물이 현대에 들어 3국을 잇는 매개고리가 됐다. 일본은 중국 개방이 본격화되기 전인 1980년 감진선사의 등신불을 중국으로 모셔와 친견 법회를 열었다. 이 법회를 계기로 중국은 문화대혁명 때 파괴한 사원을 복구하고 불교를 중흥하기 시작했다. 한국은 지난 2007년 양줘우에 최치원 기념관을 만들어 한.중 문화 가교로 삼았다. 최치원 기념관에는 한국과 중국의 문화 사상 교류가 역사적으로 잘 나열돼 있다. 일본은 천년고찰 대명사(大明寺)에 감진선사를 기리는 건물을 만들었다. 선사가 도일 전 주석했던 대명사에는 지금 승려교육기관 감진학원, 도서관 등을 지어 선사의 유훈을 기리고 있다.

이번에 다섯 번째로 열린 ‘한중일 문화교류논단’은 1000여년 전 고대 인물을 고리로 삼아 삼국이 새로운 협력과 교류를 다짐하는 자리였다. 이 행사는 지금까지 주로 경제와 문화 등 현실 현안을 다루는데 치중하다 올해부터 불교가 합세하면서 범위가 넓어졌다. 행사는 불교법회, 논단, 문화교류, 공연 등으로 진행됐다.

참가자들은 각국의 스님과 불교신자, 정부관계자, 문화인사 등 다양했다. 한국에서는 불교방송 이사장 영담스님, 전 태고종 교무부장 재홍스님, 최재천 전 국회의원, 서영교 전 청와대 비서관을 비롯한 20여 명이 불교를 대표해 참석했다.

<사진>지난 15일 열린 문화교류대회 개막식 모습.

행사를 주최한 중국은 대명사 주지 능수스님, 대만 불광사 묘사스님, 중국양줘우시불교협회 부회장 법용, 용문스님, 감진불교학원 은병건 부원장을 비롯한 진감학원 관계자들과 손아명 중국불교문화교육기금회 회장을 비롯한 관계자 등이 참석했다. 일본은 감진선사가 주석했던 나라의 당초제사(唐招提寺) 스님 신도들을 주축으로 약사사, 법융사 스님이 참석했다.

정.관계 및 문화 경제계 인사들도 대거 참석했다. 한국에서는 금호그룹 박삼구(한중우호협회회장) 회장, 최성홍 전 외교통상부 장관, 임경남 주중 대사관 정무공사, 정구종 한일문화교류협회위원장, 이원태 한중우호협회 부회장 등이 자리를 했다. 중국에서는 왕욕신(王玉新) 양줘우시 서기겸 부시장, 서익민(徐益民) 양줘우시 정무수석, 선주용(沈祖榮) 강소성 종교국 부국장, 진원관(陳雲觀) 중국 양줘우시 민족사무국장 등 정부와 종교국 관계자들이 대거 참석했다.

행사는 첫날 양줘우시 정부가 주최한 환영 만찬을 시작으로 막을 올렸다. 양줘우 시내 호텔 영빈관에서 열린 만찬회에서 중국측은 환영사를 통해 “한중일은 지리적으로 가깝고 역사와 문화를 공유하고 있는 이웃”이라며 “이번 행사에서는 특별히 불교가 함께해 의미가 깊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왕욕신 양줘우시 서기는 “이번 행사에서는 불교법회와 평화와 교류를 모색하는 포럼, 예술가들의 공연, 한중일 가요제 등 다채로운 행사가 열린다”며 “460만 양줘우시민들이 열렬히 환영하며 양줘우시장 부인께서도 불교기도회에 참석해 행사가 원만히 진행되기를 기원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측을 대표해 인사한 임경남 공사는 “3개국의 우호 증진을 위해 우리 한국도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이튿날 아침에는 영빈관 국제회의장에서 개막식이 열렸다. 개막식을 마친 참가자들은 장소를 대명사(大明寺)로 옮겨 세계평화를 기원하는 법회를 열었다.

대명사는 당나라 때 건립한 천년고찰로 감진선사가 일본으로 가기 전까지 머물던 사찰이다. 대명사 감진도서관 앞 마당에서 열린 기원법회는 축원문 낭독, 삼국대표 스님들의 헌향, 기원문 낭독 순으로 진행됐다. 기원법회에는 삼국에서 온 대표단 및 대명사 스님 신도 등 500여 명이 참석했다.

<사진>박삼구 금호그룹 회장 등 한국측 대표단 모습.

기원법회가 끝난 뒤 사찰에서 마련한 음식으로 공양을 마친 참가자들은 오후에는 감진학원에서 불교포럼을 개최했다. 불교포럼에서 발표자들은 삼국불교 교류 역사를 살펴보고 향후 계획을 밝히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왕욕신 양줘우 부시장은 “우리는 감진선사를 일본에 보내고 최치원을 받아들였다. 오늘날에는 문화도시로 발전하고 특히 공업이 놀랍도록 성장했다. 세계 경제난에도 불구하고 발전을 이룩했다. 문화 증진에도 나서 불교문화 박물관을 건립하기도 했다. 불교 육화경 사상은 포용과 원융을 강조한다. 그 사상을 따라 서로 화합 포용하자”고 말했다. 최재천 전 국회의원은 원효스님과 의상스님의 예를 들어 한중일 불교의 보편성과 특수성을 살펴보고 상호 협력하자고 제안했다. 최 전 의원은 “한국은 대륙문화와 해양문화의 가교로서 동아시아 평화를 이야기 해왔다. 원자바오 총리가 늘 이야기하는 것처럼 공통점은 찾고 차이점은 좁혀가는 지혜가 필요한 때”라고 강조했다.

삼국의 참가자들은 ‘양줘우 선언’을 채택하고 불교 가르침을 따라 자비를 실천하고 세계평화의 초석이 되겠다고 약속했다. 행사 마지막 날인 16일에는 양줘우시 불교와 문화유적을 탐방하고 불교범패공연을 관람하며 친선을 다졌다.

중국 양줘우(揚洲)=박부영 기자 chisan@ibulgyo.com

 

 

■ 한-중 불교교류 주역

영담스님  “범패공연 등으로 교류”

능수스님  “한국어 과정 개설하겠다”

이번 행사를 계기로 처음 인연을 맺은 양줘우시불교계와 한국불교계는 앞으로 최치원을 매개로 교류를 확대하기로 했다. 한국 측은 해인사와 쌍계사가 적극 나선다.

해인사는 최치원이 생을 마친 곳으로 지금도 유적이 가장 많이 남아있다. 쌍계사는 한국 범패를 창안한 진감국사 비를 최치원이 써 인연이 깊다. 영담스님이 이번 행사에 적극 나선 것도 이같은 인연 때문이다. 해인사도 고려대장경연구소 연구원을 보내 교류 방안을 모색토록 했다.

<사진>대명사 감진학원에서 영담스님(오른쪽)과 능수스님이 친선을 다짐하고 있다.

중국 측은 영담스님을 감진학원 명예원장으로 추대해 우정을 보였다. 감진학원생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원장 추대식에서 영담스님은 “한중일 삼국불교계가 힘을 합쳐 할 일이 많다. 삼국은 오래전부터 교류를 해오다 근래에 들어서는 기업간 진출이 활발하다. 여기에 불교가 더해진다면 삼국 교류는 더 확대 발전할 것”이라며 “구체적으로는 최치원이 귀국 후 인연을 맺은 해인사와 쌍계사가 중심이 돼 가령 한국의 범패를 공연하는 등 교류사업을 펼치겠다”고 말했다.

능수스님은 “우리 감진학원은 중국 유일의 지방 불교전문학교로 주로 외국어를 전문적으로 수학하며 불교계율 교리 등을 배운다”며 “지금은 영어 일본어 과정이 있는데 앞으로 한국어 과정도 개설하겠다”고 말했다. 스님은 삼국 불교 교류 협력을 위해서는 언어가 중요하다며 유학생 교환, 교수 방문 등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박부영 기자

 

 

■ 최치원과 불교

禪에 상당한 깊이…해인사서 여생 보내

최치원은 말년에 가족을 이끌고 가야산 해인사로 들어가 그곳에서 여생을 보낸다. 해인사에서 모형(母兄)인 현준(賢俊)스님 등과 도우(道友)를 맺고 지냈다. 또 희랑스님과도 친분을 맺었다. 그는 해인사에서 사찰 관련 여러 전적과 함께 불교관련 서적을 다수 남겼다.

해인사를 ‘금강석처럼 단단하며 우뚝 솟은 옥 같은 사찰(介如金剛 然玉刹)’이라고 찬탄했던 그의 말년 흔적은 지팡이가 자라 거목이 되었다는 학사대 전나무, 홍류동 계곡 곳곳에 남아있다. 해인사 말년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고 있지만 출가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양줘우시에 건립된 최치원 기념관 전경.

최치원이 찬술한 경남 쌍계사 진감선사비(851년 이후), 만수산 성주사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890년), 초월산 대숭복사비명(886년 이후), 희양산 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비명(893년) 등을 ‘사산비명’(四山碑銘)으로 부른다. 최치원이 선종에 상당한 깊이가 있음을 보여준다. <삼국사기> <삼국유사>보다 앞서고 다른 전적에서 볼 수 없는 역사 사실이 많아 한국학 불교 연구에 필수적인 금석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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