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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 | ‘국제포교 선구자’ 생애와 발자취 조명(불교신문 13/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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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한그루 작성일13-10-18 14:19 조회2,31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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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람이 좋더라

- 설산당 원명스님 10주기 추모집

50여년동안 걸어온

스님의 생애와 수좌의 길

해외포교 활동 한곳에 엮어

인연맺은 30명 추모글도 

조계종의 ‘국제포교의 선구자’로 불리는 전 연등국제선원장 설산당 원명스님의 10주기 추모집인 <나는 사람이 좋더라>(도서출판 장경각)가 출간됐다.

원명스님은 근현대에 ‘우리 곁에 왔다 간 부처’로 칭송받으며 최고의 선지식으로 손꼽히는 성철스님의 상좌로 한국불교를 해외에 알린 선구자로 평가되는 스님이다. 성철스님이 전통 선수행을 중시했던 백련암의 전통과는 특이하게 국제포교의 길을 걸었던 원명스님은 강화에 연등국제선원을 설립, 외국인 및 국내의 모든 이들이 이용할 수 있는 대중선방을 열었다.

요즘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템플스테이의 선구자인 셈이다. 하지만 선원 설립 5년 만에 외국인 제자 스님들을 남겨두고 2003년 열반했다. 올해로 원명스님 열반 10주기를 맞아 연등국제선원에서 스님이 남긴 법문 및 재외불자와 국내 불자들의 원고를 모아 추모집을 발간했다.

추모집 <나는 사람이 좋더라>에는 그간 스님이 걸어온 수좌의 길과, 해외포교 활동이 담긴 행장과 강진 백련사 여연스님과 도반이었던 명진스님을 비롯 백련암 문도인 원택스님 등 17명의 스님과 20여 명의 불자들이 쓴 추모글이 담겨 있다.

또한 생전에 불교성지를 순례하며 연재했던 원명스님의 순례기가 실려 있을 뿐만 아니라 세계 각지에서 온 추모글, 영어로 쓰인 법문을 통해 외국포교를 하던 스님의 행적과 열정을 여실히 볼 수 있다.

원명스님은 1950년 경북 고령에서 태어나 고등학생 시절 불교학생회 회장을 맡으며 불교와 인연을 맺어 밀양 표충사에서 수련회를 하는 등 왕성한 신행생활을 했다. 스님은 대학입시를 앞두고 표충사를 다시 찾았는데 지나가던 스님이 “학생, 그 공부는 해서 뭐할 건가?”하고 묻는 소리에 문득 출가할 결심을 굳힌다.

스님은 이후 해인총림 방장으로 있었던 성철스님을 찾아가 행자생활을 시작하며 산문에 들었다. 성철스님으로부터 ‘원명(圓明)’이라는 법명을 받은 스님은 스승 성철스님이 경전과 어록을 더 공부하라는 가르침을 외면하고 참선해서 견성성불하려는 마음에 선방으로 달려가기도 했다. 선방에서 대중생활을 해 본 스님은 기초가 단단해야 함을 깨닫고 백련암으로 다시 가 경전공부를 한 뒤 해인사, 봉암사, 상원사 등 전국 선원에서 12안거를 성만했다.

김천 수도암에서 참선 중이던 원명스님은 화두가 잡히지 않고 자꾸만 영어단어가 떠오르는 경험을 하게 되고 그 사건이 계기가 되어 서울에서 영어공부를 하다가 스리랑카 스님과 인연을 맺어 유학길에 오른다. 스리랑카에서 정진하며 영어공부를 하던 스님은 영국출신의 무진스님을 만나 영국으로 건너가 공부했다. 그 인연으로 스님은 무진스님에게 한국불교를 전하기도 했고, 한국불교에 매료된 영국인 무진스님은 한국으로 건너와 한국불교를 세계에 알리는데 힘을 쏟기도 했다.

외국어에 능통했던 원명스님은 이후 해외포교에 매진해 1994년에는 싱가포르 불자 모임 결성과 인도네시아 해인사 포교원 개원, 모스크바 달마사 개원, 우크라이나 불심사 개원, 크르키즈스탄 보리사 개원, 방글라데시 원명사 건립 등 다양한 해외포교 활동을 펼쳤다.

원명스님의 사제인 원타스님(합천 청량사 주지)는 발간사를 통해 “스님은 우리 곁을 떠났고 세월은 강물처럼 흘렀지만 제방의 선후학과 도반들이 스님을 회억(回憶)하는 글을 모아 한권의 책을 엮었다”며 “스님의 열정과 정정과 풍모를 기른 이 일이 묘한 향기가 되어 읽는 이들의 삶을 어루만져 줄 것으로 믿는다”고 밝혔다.

사진1 연등국제선원 엮음도서출판 장경각
사진2 설산당 원명스님은 50여년의 짧은 삶을 살다 갔지만 한국불교를 해외포교에 알리는 선구자의 삶을 살았다.사진제공= 도서출판 장경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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