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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 | 가톨릭 신부, 한국불교를 스승으로 모시다(불교포커스 13/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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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한그루 작성일13-06-24 10:52 조회2,13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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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강대 종교학과 서명원 교수 - 또 다른 나의 스승 ‘한국불교’

벌써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지난 3월초 세계인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새 교황 선출은 여러 가지로 부러움 그 자체였다. 선출방식은 물론 선출된 뒤에도 많은 사람들의 축하를 받으며 연단에 등장하는 교황의 모습은 우리 불교계에서 쉽게 볼 수 없는 장면이었기에 부러움은 더했다.

그 중에서도 더 ‘신선하게’ 느껴졌던 것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취임 일성으로 한 말이다. 교황은 선출 직후 열린 첫 기자간담회에서 “내가 바라는 교회는 가난하고, 가난한 자를 위한 교회다. 교황으로 선출되자마자 한 추기경이 날 껴안고 ‘절대 가난한 이들을 잊지 말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즉시 내 머리에서는 청빈과 평화의 상징인 아시시의 프란치스코가 떠올랐다.”고 말하며 자신의 이름을 프란치스코로 명명한 이유를 설명하기도 했다. 몇 개의 단어만 바꾼다면 불교와 불자들이 해야 할 일과 크게 다르지 않은 표현이다.
교황은 자신의 이 발언을 증명이라도 하듯 소외되고 가난한 사람들과 직접 스킨십을 나누며 ‘낮은 곳으로의’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교황을 보면서 서강대 종교학과 서명원 교수가 생각났다. 예수회의 ‘가풍’이 그래서인지, 서 교수도 스님이든 재가불자든 만나는 사람들을 격의 없이 맞아준다. 서 교수의 그런 모습을 볼 때면 꼭 영락없는 ‘친절한 불자’ 같다.

서 교수는 현재 서강대 종교학과에서 불교를 가르치고 있다. 이번 학기 학부생들에게는 ‘수양과 명상’ 과목을 가르치고 있고 대학원생들에게는 ‘소승불교에서 대승불교의 형성에 이르기까지’를 주제로 강의하고 있다. 대학원 수업에는 불교, 개신교, 가톨릭 등 다양한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참여하고 있다고 한다.

“여러 종교인들이 같이 공부를 하기 때문에 저의 역할이 무척 중요합니다. 감정이 앞서면 학문적 정신을 잃어버리고 싸우게 되거든요. 종교가 다른 사람들끼리 가끔 옥신각신 하기도 하지만 재미있게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서로를 배려하면서 토론을 하다 보면 상호 이해의 깊이가 깊어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서 교수는 수업 외에도 사제로서의 사도직과 함께 선도회 지도법사로도 활동하고 있다. 1인 3역을 거뜬히 소화하고 있는 것이다. 고향 캐나다에서 프랑스로, 다시 한국으로 공간을 옮기는 동안 의학도에서 사제로, 또 불교를 가르치는 스승으로서의 삶을 이어가고 있는 서명원 교수에게 불교는 어떤 것일까?

chapter 1 - 의사가 행복을 가져다주지 않았다

서 교수는 캐나다 몬트리올 출신이다. 고등학교까지 캐나다에서 다닌 뒤 프랑스에 있는 의대에 갔다. 의사가 되겠다는 꿈을 안고 이역만리까지 왔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드는 생각은 “이건 아니다.”였다.
“통증과 싸우며 온몸이 망가지는 사람들을 보면서 의사가 환자들 고통의 근원을 없애줄 수는 없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무력감과 역부족을 많이 느꼈지요. 죽음 앞에서 아무것도 못할 때가 많았습니다. 공부할수록 답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해부학연구실에서 근무를 하면서 350여구가 넘는 시신들을 해부했습니다. 죽음을 직접 본 것이죠. 동료들 중에는 알코올 중독자가 많았어요. 정신을 어지럽혀야 버틸 수 있는 곳이 해부학연구실이었거든요. 의대에서의 6년은 정말 행복하지 못했어요.(서 교수는 “I Was Not Happy.”를 계속 반복했다.) 죽음과 죽음 이전의 그 무엇, 즉 생(生)과 사(死) 등에 대한 고민이 점점 커져만 갔습니다.

그래도 사람들은 그냥 졸업해서 의사가 되면 더 편안하게 살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제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어요. 저 자신의 존재이유, 모든 생명의 존재 이유가 궁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도 알고 싶었고요. 그런 고민을 계속하던 중에 알고 지내던 지인의 소개로 예수회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1979년의 일이다. 촉망받던 의학도가 하루아침에 사제가 되겠다고 하자 주변에서는 난리가 났다. 그러나 서 교수의 의지는 확고했다.

서 교수는 리옹과 파리에서 사제가 되기 위한 담금질을 계속했다. 그러던 중 1984년 예수회 한국지회에 파견되면서 처음 한국에 왔다. 7주 동안 한국에 머물면서 서울부터 제주도까지 여러 곳을 둘러봤다. 한국의 모든 것이 낯설었지만 뭔가 모를 친근함이 느껴졌다. 인연이었는지 서 교수는 이듬해 다시 한국에 왔다.

chapter 2 - ‘서명원’이 되다!

한국에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기에 앞서 서 교수는 새로운 이름을 얻었다. 본명인 Bernard Senecal 보다 더 편하고 친근한 ‘한국식’ 이름이 필요하다고 느낀 당시 서강대 총장 서인석 신부가 이름을 지어줬다.

“한국인이 볼 때 서양사람 이름이 좀 복잡하잖아요. 발음도 어렵고요. 서인석 신부님이 한국이름을 만들자고 하셨어요. 성(姓)은 서 신부님의 것을 받았습니다. 서 신부님 조카들의 돌림자가 ‘원(原)’이었는데 몇몇 수녀님들이 도와주셔서 중간자를 ‘명(明)’으로 했어요. 다른 이름도 몇 개 만들었는데 ‘필(feel)'이 없었어요. 하하.

‘명원’을 한국말로 풀면 ‘빛이 나오는 샘’입니다. 빛이 되라는 뜻이기도 하죠. 또 깨달아서 살라는 의미도 있고요. 좋은 뜻도 있고 발음도 어렵지 않아서 ‘명원’이라는 이름을 받아들이고 그 의미를 이해하며 살려고 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이름을 받고 한국에서의 생활을 시작한 서 교수는 한국어 공부부터 했다. 3년 동안 대학 어학당에 다니면서 어느 정도 ‘감’을 잡자, 서 교수는 언어의 배경이 되는 한국문화 전반이 궁금해졌다.

“한국의 역사와 문화, 문학, 종교 등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다보니 한국어를 깊이 있게 구사하지는 못했어요. 그래서 한국의 종교를 공부하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한국 무속신앙부터 유교, 도교, 불교에 대해 조금씩 공부를 했어요. 그 중에서도 한국문화의 근간을 이루는 불교를 알아보자고 생각하고 그때부터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서 교수는 본격적으로 불교를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에 먼저 인도로 향했다. 불교를 이해하려면 인도의 부처님 성지를 둘러봐야 한다는 지인들의 권유 때문이다. 불교 수행을 경험하고 싶은 서 교수의 의지도 물론 작용했다. 부처님 성지를 돌아보며 체험한 위빠사나는 가톨릭에서 맛본 적 없는 ‘신세계’였다.

“머리로만 이해하기보다 실제 수행을 하면 더 쉽게 불교에 다가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렇게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봐도 불교는 머리로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 같아요. 반드시 수행이 병행되어야 합니다.”
파리로 돌아가 불교학과 신학 석사 과정을 마친 서 교수는 서품을 받고 다시 한국에 와 사제로서의 활동을 시작했다. 한국에서의 ‘제3의 삶’이 시작된 것이다.

chapter 3 - 박사 연구 주제, ‘성철’

프랑스 파리 제7대학에서 조계총림 송광사 방장이었던 구산 스님 관련 연구로 석사를 마치고 박사를 공부하던 중 서 교수는 성철 스님을 만났다.

“1990년대 초반에는 한국 불교를 알 수 있는 영어 책이 많지 않았습니다. 한국어 능력도 많이 부족해 영어로 된 불교책을 보다가 로버트 버스웰 교수의 『파란 눈 스님의 한국 선 수행기 (The Zen monastic experience : buddhist practice contemporary Korea)』를 읽고 성철 스님을 알게 됐습니다. 책의 내용 중 한국의 돈점(頓漸) 논쟁을 소개하는 부분이 있었는데 그것을 보고 ‘나의 박사 연구주제는 성철’이라고 단박에 느낌이 왔습니다.”

성철 스님을 통해 한국불교를 공부하게 된 것이 “잘못된 시작”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결국 서 교수는 2004년 파리7대학에서 ‘성철 스님의 전서 및 생애’를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게 된다.

“제가 성철 스님을 주제로 박사 학위 논문을 쓸 때 성철 스님에 대한 말할 수 없을 정도의 신랄한 비판을 들어야 했습니다. 당시 불교학계의 주류는 보조 스님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형성하고 있었거든요. 학자들은 물론 때로 평범한 사람들조차도 ‘돈오돈수(頓悟頓修) 사상이 도대체 실제 삶에서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혹독한 질문들을 해 왔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 중 몇몇은 성철 스님의 열반송을 인용하면서, 입적하기에 앞서 성철 스님은 자신이 저질렀던 사상적 오류를 스스로 고백했다는 주장까지도 서슴지 않았어요. 제가 박사 과정을 마치고 2004년 가을 학기부터 서강대 종교학과 대학원생들에게 한국불교를 가르치기 시작했을 때에는 성철 스님에 대한 더 크고 무조건적인 거부반응을 직접 보고 들어야 할 때가 많았습니다.

저는 성철 스님에 대한 그 모든 비판들을 오늘에 이르기까지 하나하나 다 귀담아 들어 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님에 대하여 친밀감이 떨어지기보다는, 오히려 성철 스님 사상의 참다운 특성이 무엇인지를 정리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직접 뵙지는 못했지만 『선문정로』와 『본지풍광』 등의 책을 통해 성철 스님을 만났고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성철 스님에게 많은 신세를 졌습니다. 저와는 불가분의 관계지요. 저의 불교관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분이기도 합니다. 간화선을 하고 있는 저에게 성철 스님의 사상은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성철 스님이 부처님에게 밥값을 했다고 말한 『선문정로』만 보아도 선 수행의 바른 길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법(法)을 위해 위법망구(爲法忘軀)했던 성철 스님의 모습은 지금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고 봅니다.”

서 교수는 “‘성철(性澈)’이라는 법명도 불성을 철저하게 깨달은 사람의 뜻이라고 이해하고 있다.”며 “성철 스님처럼 되는 것이 나의 중요한 목표 중의 하나”라고 덧붙였다.

chapter 4 - 법사(法師)가 된 신부

서 교수는 박사 공부와 함께 본격적으로 간화선(看話禪) 수행을 시작했다. 1996년 서강대 박영재(법명 법경) 교수가 이끄는 선도회 입문을 전후로 “한국불교 고유의 수행법이 간화선이라는 것을 알고 화두 참구를 시작했다.”는 서 교수는 입문 10여 년 만에 지도법사 박 교수로부터 ‘천달(天達)’이라는 법명을 받고 2007년부터는 학생들과 재가자들에게 선을 지도하고 있다. 국내외 사람들 30여명이 지금도 서 교수를 통해 점검을 받고 있다. 천달은 하느님을 의미하는 천(天)과 선도회를 만든 종달 이희익 거사의 호에 있는 달(達)을 합쳐 만든 것이라고 한다.

“한국불교에서 선도회의 장점은 제도권 불교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롭다는 것과 이웃 종교에 대해 열려 있다는 것입니다. 또 입실점검 제도가 온전히 살아 있는 것도 큰 장점입니다. 가톨릭 사제인 제가 20여년 가까이 선도회와 인연을 맺을 수 있었던 이유들이기도 합니다. 입실제도는 간화선 수행자가 확철대오(廓撤大悟)할 때까지 스승이 계신 방에 들어가서(入室) 수행 과정에 대한 꾸준한 점검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

선도회가 사용하는 일련의 화두는 ‘무(無)’자를 비롯한 초보자를 위한 스무 칙(則) 정도의 화두들, 무문혜개 선사의 『무문관』에 나오은 48칙의 화두들, 『무문관』의 과정을 마무리하기 위한 8칙의 화두, 그리고 『벽암록』 100칙의 화두들이라고 한다.

선도회의 화두점검 체계는 세 과정으로 구성되어 있다. 초심자를 위한 첫 번째 과정은 ‘시작하는 사람들을 위한 화두들’이란 점검과정이다. 여기에는 앞서 밝힌바와 같이 ‘무(無)’자나 ‘동산수상행(東山水上行)’ 등 초심자들이 붙들고 씨름하기 쉬운 화두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 과정을 마치면 입실 시 스승을 경외하던 심적 초긴장 상태는 사라지고 법명을 받고 『무문관』에 있는 48개의 화두들을 본격적으로 점검 받는 두 번째 과정으로 들어간다. 대개 이 점검 과정을 마치면 스승 없이도 혼자 지속적인 수행이 가능해진다고 한다. 끝으로 세 번째 마무리 과정에서는 『벽암록』을 포함해 조사어록에 있는 화두들을 가지고 스승과 거의 대등한 관계에서 법전(法戰)을 벌이게 되는데, 이 과정을 마치면 노사(老師)로부터 인가를 받게 된다. 이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제자들을 지도할 수 있는 법사(法師)로서의 역량을 갖추게 된다고 한다.
“수행을 처음 시작할 때는 입실에 대한 두려움이 생기지만, 얼마 지나면 오히려 자신감이 생겨서 스승과의 만남을 기다리게 됩니다. 객관적인 점검을 받음으로써 엉뚱한 길로 빠지지 않고, 스승과의 만남을 통해 수행하려는 의지를 계속 키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서 교수는 호흡법을 통해 간화선 수행을 시작했다. 호흡을 보면서 마음을 다잡고 화두에 집중했다. 화두참구가 잘 안되면 다시 호흡법으로 돌아와 수행을 이어갔고, ‘무(無)’자 화두를 들고 수행을 거듭했다. 물론 화두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은 쉽지 않았다.

“간화선은 어려운 것이 사실이고 사람에 따라 맞지 않을 수도 있지만. 저한테는 잘 맞았어요. 맑은 사람이 되어간다는 느낌을 받았지요. 끝까지 가야하는 길이라는 확신이 듭니다.”

화두공부가 잘되고 있느냐는 질문에 서 교수는 “선(禪)을 지도하기도 하고 지도받기도 하지만 아직은 미성숙이에요. 아직 미흡한 부분이 많아요. 확철대오(廓撤大悟)는 아직 못했습니다. 돈오돈수적인 생활을 하려고 하는데 쉽지는 않습니다.”라며 웃었다.

“간화선 수행을 통해 저의 뿌리인 영성이 더 깊어지는 것을 느끼며, 또 뿌리가 깊어질수록 불교와 더 친해지는 것 같아요. 언어화 할 수 없는 진리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 느껴집니다. 간화선 수행은 한국 사람들의 ‘빨리빨리’ 식이 아니라 ‘꾸준히’ 해야 합니다.”

서 교수는 나름의 간화선 수행 노하우에 대해 귀띔해줬다. 간화선 수행이 나의 길이라는 확고한 신심(信心)이 있어야 하고, 정기적으로 도반들과 함께 정진을 해야 하며, 특히 스승을 찾아 입실(入室)해 반드시 점검을 받아야 한다.
“빠른 깨달음이라도 ‘생활화’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냥 깨달은 것’일 뿐이에요.”라고 지적하며 깨달음의 생활화를 강조한 서명원 교수는 “무조건적으로 남을 위한 인생을 사는 것, 보살행을 실천하는 것이 깨달음의 진정한 의미라고 생각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하루 5분이라도 앉는 습관을 들이는 것이 필요하다.”고 밝힌 서명원 교수는 선어록들을 영어로 번역해 서양인들에게 간화선을 소개할 계획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저는 사제이지만 불교를 전공했고 불교 없이는 못사는 사람이 됐습니다. 폴 니터 교수가 말한 것처럼 붓다 없이 그리스도인일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지요. 불교 덕분에 영적으로도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불교가 저로 하여금 더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간화선 수행을 하면서 “출가를 고민한 적도 있다.”고 밝힌 서 교수를 보면서, 『금강경』 한 구절에 마음이 열려 오조홍인을 찾아가 “출신의 차이는 있겠지만, 불성(佛性)에는 남북이 없다.”고 ‘맞짱’을 뜬 육조혜능이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

오늘도 많은 사람들은 ‘진짜 불자’ 서명원 교수가 내딛는 묵직한 발걸음에 주목하고 있다. 서 교수에게도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다음 생에도 인연이 된다면 한국불교를 공부하실 것입니까?”
“제가 프랑스에서 계획에 없이 사제가 되고 또 우연하게 한국에 오게 된 과정들을 보면 모두 ‘인연’으로밖에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저에게 만약 다음 생이 있다면 지금 제가 하고 있는 일들을 좀 더 성실하게 하고 싶습니다. 저는 예수님의 제자이자 부처님의 제자이자 성철 스님의 제자이자 종달 노사의 제자입니다.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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