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소식

News | [부처님오신날 특집] ‘한국불교 전래길’ 실크로드를 가다(불교신문 11/05/06)

페이지 정보

작성자선정화 작성일11-05-18 11:31 조회2,727회 댓글0건

본문

둔황 명사산의 사막길.

지난 4월12일부터 18일까지 한국불교의 전래루트인 중국 실크로드를 다녀왔다. 유적 곳곳에 불교가 전래된 흔적이 켜켜이 남아 있었다. 투루판의 고창고성과 현장법사의 구법루트인 화염산, 배제클리크 천불동, 교하고성을 거쳐 혜초스님의 저서 <왕오천축국전>이 발굴된 둔황석굴, 구마라집스님이 애마(愛馬)를 기리기 위해 세운 백마탑, 난주 병영사 석굴. 모래바람 가득한 그곳에는 구법자의 발자욱이 뚜렷했다.

구마라집 현장스님 유적 ‘오롯’

혜초스님 ‘왕오천축국전’ 발견한

둔황석굴에 오르니 만감 교차해


우루무치

황량한 사막과 점점이 보이는 오아시스가 끝없이 펼쳐지는 곳이 실크로드였다. 우랄산맥과 천산산맥 곤륜산맥이 나란히 가로로 서 있고, 그 중간 중간에는 사막이 끝없이 펼쳐지는 신강성의 서북 끝자락에 우루무치가 있었다. 북경에서만도 비행기로 4시간이니 인천에서 북경까지 가는 2시간에 비해 2배로 먼 여정이다.

세계에서 가장 내륙에 위치한 도시 우루무치는 위구르자치구인 신강성의 성도이기도 하다. 그래서 지금도 동서교역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예로부터 천산산맥의 만년설을 끌어 들여 수백 년을 살아온 이 지역은 위구르족이 상당수를 차지하며 종교도 이슬람교를 신봉하는 무슬림들이 대부분이다.

황량한 타클라마칸 사막과 타림분지를 넘어 도착한 천산산맥의 만년설을 보며 순례자들은 ‘희망’을 노래했을 것이다. 그래서 순례의 첫 방문지로 천산산맥의 심장인 ‘천산천지’를 선택했다. 물길을 따라 몽골식 가옥구조를 가진 파오를 지나 해발 1910m에 위치한 천산천지. 백두산 천지보다는 작지만 해발 5445m의 뻐거다봉을 품고 있는 장엄한 모습은 순례자의 마음을 설레게 하기에 충분했다.

투루판

우리에게는 일반적으로 ‘토번’으로 불려 친근한 지역이다. 우루무치에서 남동쪽으로 150Km떨어진 도시다. 연 강수량이 16mm에 불과한 분지인 투루판은 포도산지로 유명하다. 이곳에는 2개의 고성이 유명한데 그 중 가장 오래된 고성이 교하고성이다. 유네스코에 등재된 교하고성은 투르판 시내에서 서쪽으로 10Km 정도 떨어져 있는데 기원전 108년부터 기원후 450년까지 왕성했던 고대의 차사전국이었다. 왕성은 교하성(交河城)이라고 불리었다. 성 아래에 강이 흐르고 있었기 때문에 불린 이름이었다.

잦은 전란으로 멸망하기 전까지, 중국에서 전란을 피해 고창으로 이주하는 사람이 많아졌고, 북량의 왕족 저거씨가 차사국을 멸하고, 450년에 고창국을 세운다. 이 고창국은 북방민족의 영향 하의 원(元), 감(), 장(張), 마(馬)의 네 성씨가 왕이 되어, 498년에 국가를 세우고 고창왕이 되어, 640년에 당나라에 멸망될 때까지 계속된다. 이들 두 왕국 역시 실크로드의 중심지이자 불교를 전한 중심길이었다. 그래서 교하고성과 고창고성은 성의 중심축에 대불사(大佛寺)가 위치하고 있었다. 고창국은 당나라에 정복돼 안서도호부를 두고, 서역 경영의 거점으로 삼은 곳이기도 했다. 그 당시에는 당나라 현장스님이 이곳에서 경(經)을 강의하기도 한 경당터가 남아 있으며 고창왕국 왕과의 깊은 인연과 배려로 천축(인도)을 무사히 다녀올 수 있었다는 일화도 전한다.

불교를 신봉했던 고창국은 당나라의 국력이 쇄약해지고 징기스칸의 침략으로 무너진 뒤 화려했던 불교문화는 소멸되거나 파괴돼 버렸다. 대신 천산 위구르 왕국의 지배하에 들어가 이슬람문화권을 형성했다. 현재까지 이 지역은 이슬람문화가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투루판 동남쪽에는 소공탑이라는 대형 이슬람사원이 건립돼 무슬림들의 신앙중심지가 되었다. 투루판의 명소는 화염산으로 <서유기>에 등장하기도 한다. 현장법사의 구법순례길인 화염산은 지금도 그 모습을 온전하게 간직하고 있으며 고창고성을 번성시킨 고창왕국이 조성한 베제크리크 천불동이 투루판시내에서 45Km떨어진 거리에 위치한다.

‘아름답게 장식된 집’이라는 이름의 이 천불동은 화염산 중단의 만불산 언저리에 조성된 불교석굴로 총 83개의 석굴이 있었으나 현재는 57개 석굴만 남아 있다. 하지만 이것 역시 이슬람교도의 소행으로 추정되는 훼불로 인해 그 형체가 온전히 남아 있지 못하다. 설상가상으로 일본과 서구열강의 중국 문화재 도굴로 인해 곳곳에 상처가 남아 있다. 천불동 곳곳에 남아 있는 벽화의 형태만 과거 번영했던 불교문화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 씁쓸한 미소를 짓게 한다.

   
둔황석굴 전경.
둔황

실크로드 순례길의 핵심 지역이다. 투루판에서 밤새도록 달린 기차가 유원역에 순례자를 내려놓는다. 이곳에서 버스를 타고 다시 3시간여 동안 사막길을 달려 도착한 곳이 오아시도시 둔황이다.

기린산맥의 물을 끌어들여 농사와 생활용수를 사용하는 둔황은 ‘모래의 마을’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둔황이 존재하게 된 이유는 ‘막고굴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역만리길을 멀다 않고 달려온 순례자인 우리일행 역시 <왕오천축국전>이 발견된 둔황막고굴을 친견하기 위함이 가장 큰 목적 중의 하나였다. 일반적으로 ‘천불동’으로 불리는 둔황막고굴 역시 사막 중간의 한 점에 불과한 오아시스에 위치하고 있었다. 사방을 둘러봐도 모래바람이 가득한 절벽 석실에 새겨진 불심(佛心)의 흔적은 현재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돼 전 인류에게 감동을 주고 있다.

감숙성 둔황시 동남쪽 25Km. 명사산 동남쪽 단층 벼랑에 상하 5층 감실 곳곳에 조성된 1000여개가 넘는 석굴. 과히 이곳을 순례자는 ‘불국토’라 부르고 싶었다. 전진(前秦)시대 낙준스님에 의해 처음 개착된 막고굴은 오대, 서하, 원나라를 거치면서 계속 늘어났다. 현재 보존된 492개의 석굴가운데 수나라와 당나라 때 건축된 굴은 300여개로 제일 많다. 막고굴은 한마디로 불교건축과 벽화 조각의 발화와 발전의 변천사를 보여주는 노천박물관인 셈이다. 1000여년전에 조성된 석굴은 시기를 거치면서 덧칠해지거나 재조성되어 밑바탕에는 앞선 시기의 작품이 보이기도 한다.

이 어마어마한 ‘불국토박물관’은 서구열강의 침입 속에 도굴돼 곳곳에 상처가 남아있었다. 그중 대표적인 곳이 그 유명한 17굴이다. 이곳에서 발굴된 수만점의 전적과 유물이 흩어져 버렸고, 그중 한 점이 혜초스님의 저서 <왕오천축국전>이다. 천축국을 여행하며 돌아오는 길에 남긴 저술이 어떤 경로로 이곳에 보존됐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불교가 전래된 길을 따라 수많은 수행자들이 순례의 길을 다녔고, 그중 한 명이 혜초스님이었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17석굴에 들어서는 순간 만감이 교차했다. 구법을 위해 목숨을 걸고 순례길을 나섰던 혜초스님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순례길 지도법사 일지스님(인천불교회관 주지)은 “해동국인 우리나라에 법을 전하기 위해 구법행에 나선 ‘구법자 혜초스님’의 후예가 된 것이 자랑스럽다”는 소회를 밝혔다.

   
구마라집스님이 조성한 백마탑.

둔황석굴 친견에 이어 순례자들은 백마탑으로 향했다. 이곳은 불경역경에 큰 족적을 남긴 구마라집스님에 대한 애틋한 이야기가 전해지는 곳이다. 구마라집스님은 7세 때 출가한 인도의 수행자다. 스님은 주로 쿠차(옛 구자국)에서 대승포교 활동을 하다가 384년 부처님의 가르침을 중국에 전하기 위하여 인도에서 백마에 불경을 싣고 시안(옛 장안)을 향해 가는 중 타클라칸 사막을 건너다가 백마가 병에 걸려 죽었다. 애마를 잃은 스님이 둔황 보광사에 도착하여, 잠시 머물며 역경 작업에 몰두하였는데 항상 백마 생각이 눈 앞에 아른거려 작업을 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이곳에 말의 영가를 천도하기 위해 ‘백마탑’을 세웠다고 한다.

그 후 구마라집스님은 <법화경> <아미타경> 등 경(經) 률(律)을 합하여 74부 380 경전을 중국어로 번역하였다고 한다. 백마탑을 돌며 순례자들은 구마라집스님의 역경불사로 인해 불법을 전할 수 있었던 고마움을 전했다.

이어 찾은 명사산. 해발 1650m에 800Km가 넘는 광활한 모래사막에 낙타로 다양한 물품을 실은 실크로드 상인들이 서역을 오가던 모습이 선연하다. 그 중에는 혜초스님과 현장스님 구마라집스님 등 헤아릴 수 없는 수행자들도 이 사막길을 건넜을 것이다. 명사산 안에 위치한 월아천 누각 지붕에 쌓인 모래알 수만큼….

   
병영사 석굴 전경.
난주

기차를 타고 밤새도록 달려 도착한 곳이다. 감숙성의 성도인 중공업도시 난주는 매연으로 가득했다. 중국의 발전상을 보여주는 듯했다. 시내를 벗어난 60여Km 거리에 위치한 병영사석굴은 거대한 황하의 물줄기가 가로막힌 황하댐 중간에 있었다. 과거 이 곳은 매마른 황토흙에 풀 한포기 자라지 않는 바위산이었을 것. 그 직선절벽에 서진(西秦)시대인 4세기부터 조성한 불상군들이 북위, 북주, 수, 당, 명나라를 거치며 700여기가 들아앉아 있었다. 기암괴석과 어우러진 절벽에 아로새겨진 불.보살님들과 당나라시대때 조성된 거대한 마애석각대불이 찬란했던 불교문화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협찬=조계종전법도량 인천불교회관

댓글
주제와 무관한 댓글, 악플은 삭제될 수 있습니다.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