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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 | 기획연재)조계종 국제 무대 나서다(上) ...불교신문 11. 1.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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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관리자 작성일11-01-20 14:21 조회2,95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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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서울에서 열린 세계불교지도자 대회에 참가한 각국의 불교지도자들이 청와대를 방문, 박정희 대통령 내외와 기념 촬영을 했다. 사진제공=국가기록원

 

 

정부 지원 아래 불교국 상대로 활발한 교류


중앙정보부 나서 종단 지도부 ‘스리랑카 국빈 방문’ 주선

1970년 10월 서울서 첫 국제 불교대회 개최…국가적 행사



1970년 10월 10일부터 15일까지 서울에서는 세계불교지도자 대회가 열렸다. 이 행사는 신생 종단인 태고종의 불참 속에 조계종 주도로 법화종 진각종 불입종 등이 함께한 한국불교 주도의 첫 세계 불교대회였다. ‘하나의 세계, 하나의 동포’라는 기치를 내건 세계불교지도자 대회에는 중국, 남베트남, 캄보디아, 인도, 네팔, 파키스탄,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티베트, 홍콩, 일본 등 동아시아 25개국 250여명이 참석했다. 대만의 백성, 베트남의 차우 스님 등 국제적인 인물이 대거 참석했다.

이 대회를 주도한 인물은 청담스님과 능가스님이었다. 대회 본부장을 맡았던 능가스님은 1967년부터 청담스님 등과 논의해 세계불교 연합 상설기구를 한국에 유치하기로 하고 세계 불교계와 접촉을 활발하게 펼쳤다. 그 결실이 한국이 주도하는 첫 불교도 대회 개최였다. 이미 20년 전에 만들어진 세계불교도대회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세계불교지도자 대회라는 이름으로 유사한 행사를 개최한 것은 다분히 국내 사정과 관련이 깊었다.

종단의 몇 몇 지도부 사이에 은밀하게 진행하다 대회를 불과 1년여 앞두고 종단 행사로 격상해 그 성격과 자금출처 등을 놓고 의혹이 일기도 했다. 1970년 발족한 준비위원회 명단은 이 행사가 범정부 차원에서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고문에는 정관계는 물론 재계와 언론 학계 대표자들이 총망라됐다. 행사기간 동안 세계 각 국의 참가자들은 불국사 등 사찰 뿐만 아니라 판문점 등 분단의 현장을 둘러보고 한창 시작되던 산업시설도 시찰했다. 박정희 대통령과 영부인은 각국 불교지도자들을 청와대로 초청해 격려했다. 국무총리 문공부 장관, 농림부 장관 까지 만찬 오찬을 베풀었으며 행사는 워커힐 등 특급호텔에서 주로 열렸다.

이 행사의 주 목적은 불교국제 상설기구의 한국 유치였지만 민간외교 측면이 강했다. 이는 정부가 행사를 주로 지원한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당시 한국은 북한과 국제무대에서 경쟁을 펼치고 있었다. 1960년대 까지 경제면에서 북한에 뒤졌던 한국은 1970년대부터 제5차 경제개발의 성공을 바탕으로 국제무대에 활발하게 진출했다. 그 중에서도 유엔에서 발언권이 강하던 제3세계가 주 대상이었다. 그 때 까지 제3세계는 주로 북한에 우호적이었다. 한국은 국제 사회에서 발언권이 약했다. 아시아의 제3세계 국가들은 대부분 불교 국가였다. 이 점을 정부와 한국의 불교계가 십분 활용한 것이다. 1988년 해외 여행 자유화 때 까지 일반인이 외국에 나가기는 하늘에 별 따기 보다 어려웠다. 해외 여행을 엄격히 제한하던 당시 국제무대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던 분야중 하나가 불교계 였다. 불교계는 주로 세계불교도 대회를 통해서 국제무대에 얼굴을 알렸다. 해외에 나가는 것이 쉽지 않던 시절이어서 행사 참석자는 총무원장 종정 등 종단의 최고 지도자였다. 그 중에는 일찍부터 국제화의 중요성에 눈 떠 자운스님처럼 한번 나가면 몇 개월 씩 각국을 순회하는 스님도 있었다.



 조계종이 처음 국제 무대에 참가한 1956년 네팔에서 열린 세계불교도대회 모습. 가운데 동산스님, 청담스님, 효봉스님이 보인다.

조계종 1956년 제4차 세계불교도대회부터 참가 ‘해외 체험’

1970년대 세계대회 유치 활발 ‘북한과 외교 경쟁’ 정부 지원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초 한국 불교계는 정부의 지원 아래 국제 무대에 활발하게 얼굴을 내밀었다. 1970년 세계불교지도자 대회에 이어 1971년 10월31일부터 11월 5일 까지 세계고승합동대법회가 열렸다. 10개국 22명의 고승들이 참가한 법회는 능가스님이 주도해 범어사에서 열렸다. 1973년 8월26일 제2차 세계불교청년지도자 대회가 서울에서 열렸다. 12개국 62명이 참석해 사찰과 공업단지 새마을 시범 단지 등을 둘러보았으며 육영수 여사는 이들을 위해 만찬을 베풀었다.

이어 9월 4일 룸비니 개발에 한국불교가 적극 참여하기 위해 한국위원회가 창설됐다. 위원장에는 불교신자로 당시 국회문공위상임위원장인 육인수 씨가 선임됐으며 전국신도회 김제원 회장, 조중훈 한진그룹회장, 함병선 예비역 장군이 부회장을 맡았다. 육인수씨는 육영수 여사의 친 오빠다. 당시 활발하게 진행됐던 국제불교권과의 교류가 정부의 지원 아래 진행되었음을 보여준다.

1976년 5월에는 종정 서옹스님을 단장으로 종회의장 녹원스님, 해인사 주지 도광스님, 총무원 재무부장 월서스님, 사회부장 혜성스님과 김제원 신도회장, 국회의원 서영희, 윤여훈, 서인석 등 정계 인사들이 대거 스리랑카를 국빈 방문했다. 한국대표단은 홍콩, 태국을 거쳐 스리랑카를 방문, 대통령 수상 등 스리랑카 정치 지도자와 각 종파의 지도자들을 만났다. 이 방문은 중앙정보부가 기획했다. 당시 사절단으로 참가했던 월서스님(원로의원)은 “중정의 조과장이라는 사람이 행사를 기획하고 우리를 인솔했다. 당시 스리랑카는 세계최초의 여성 수상인 반다러나이케 여사가 지배하고 있었는데 친 사회주의 정책을 폈다. 아마, 스리랑카를 통해 중국 등 사회주의권과 교류를 모색하던 정부의 정책을 위해 불교의 힘을 빌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월서스님은 “국회의원들이 우리 보다 앞에 앉았다가 스리랑카 지도자들이 혼을 내고 뒤로 쫓아낼 정도로 스님들을 아주 극진히 모셨다”고 덧붙였다.

한국불교의 국제 무대 진출은 이처럼 정부의 외교 정책에 발맞춰 진행됐다. 세계연방평화촉진 종교지도자 대회, 홍법대회 등 다양한 국제 불교 행사가 있었지만 한국불교가 주로 활동한 무대는 ‘세계불교도 대회’였다. 세계불교도우의회(WFB)가 주최하는 최대 국제 불교행사인 세계불교도대회는 스리랑카의 ‘마라라 세케라’박사가 주창해 1950년 스리랑카에서 첫 대회가 열렸다. WFB 초대 회장을 역임했으며 실론대학 교수, 주영 스리랑카 대사 등을 역임한 그는 1948년 스리랑카가 영국에서 독립한 뒤 세계불교도의 단합을 통한 기아(飢餓), 전쟁 등 인류재앙을 막고 서로 화합하자는 불교의 사상을 전 세계를 돌며 전파하고 세계불교도우의회의 창립을 주창했다. 첫 대회에는 세계 29개국 127명이 참가했는데 아시아 불교국가는 물론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서양의 불교도도 참석했다. 뿐만 아니라 중국 북한 등 당시 적대국 까지 모두 참가하는 국제 기구였다.

격년제로 열리는 이 행사에 한국은 1952년 제2회 대회부터 대표단을 보냈다. 1952년 9월25일 일본 도쿄 본원사(本願寺)에서 열린 제2차 세계불교도대회에 중앙총무원장인 이종욱 스님과 재무부장 장용서(張龍瑞)가 참석했다. 장용서는 1949년 창간한, 중앙총무원의 기관지 격인 월간 <불교공보(佛敎公報)> 편집인을 역임한 언론인 출신이다. 그는 1936년 동아일보가 베를린 마라톤 대회에서 우승한 손기정의 가슴에 새겨져 있던 일장기를 지운, ‘일장기 말소 사건’의 장본인이기도 하다. 첫 참가 후 10년간 옵저버 자격으로 있다가 1966년 제8회 대회부터 정식 회원국으로 가입했다. 제 3차 대회는 1954년 12월 버마(현 미얀마) 랑군에서 29개국 2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조계종이 국제무대에 첫 선을 보인 때는 1956년 제4차 대회 부터다. 1955년 8월 승려대회를 통해 종권을 대처승으로부터 이양 받고 이듬해 세계 무대에 나선 것이다. 이 해 12월15일부터 26일 까지 네팔 카트만두에서 열린 제4차 세계불교도대회에 동산스님, 총무원장 효봉스님, 금오스님, 청담스님, 이기영 박사 등이 참석했다. 대회에 참가한 스님들은 부처님 탄생지 룸비니, 성도지 부다가야 등을 방문하고 성역화를 주창했다. 제4차 대회는 불교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띤다. 부처님 입멸 2500년을 기념해 열린 이 대회에서 불교 국가마다 서로 다르게 사용하고 있는 불기(佛紀)를 통일해 1956년을 불기 2500년으로 정할 것을 논의했다. 또한 양력 5월 15일을 부처님 오신날로 결정했다.

조계종은 이후 꾸준히 세계불교도대회에 참가해 각 국의 불교도들과 우의를 돈독히 한다. 1958년 12월 24일부터 30일 까지 태국 방콕에서 열린 제5차 대회에는 동산스님, 청담스님, 서경보 스님과 박길진 손규상 등이 한국대표로 참석했다. 제6차 대회는 1961년 11월 14일부터 22일 까지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열렸다. 한국은 청담스님, 금오스님, 이기영박사가 참석했다. 1964년 11월29일부터 12월4일 까지 인도 베르나스 시 녹야원에서 열린 제7차 대회에는 손경산스님, 이한상 불교신문사장, 조명기 이기영 박사 여동명 등이 참석했다. 하지만 이 때 까지 한국은 옵저버 자격이었다.

박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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