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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 | 한국의 노벨상 '만해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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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관리자 작성일11-03-07 14:41 조회2,58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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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만해대상 제15회 수상자로 평화부문 아누라다 코이랄라(마이티네팔재단 대표), 실천부문 시리세나 반다 헤티아랏치(스리랑카 고고학자), 문학부문 모옌(莫言, 중국 소설가)과 이근배 시인(문학부문은 공동수상)이 각각 선정됐다.

만해사상실천선양회(총재 자승 스님)는 지난 3월 1일 심사위원회(위원장 양승태 대법관)를 열어 2011년도 만해대상 수상자를 이같이 결정했다.

평화부문 수상자 코이랄라는 위험과 개인적 희생을 감수하며 여성과 소녀들을 성노예로부터 해방시키는 운동을 펼친 것이 높은 평가를 받았다. 실천부문 헤티아랏치는 스리랑카를 대표하는 고고학자이자 불교학자로 특히 아쇼카 석주의 브라흐미 문자를 해독하는 몇 안 되는 전문가로도 명성이 높아 이 분야에 세계적인 업적을 쌓은 점이 인정됐다. 중국을 대표하는 소설가 모옌은 노벨문학상에 가장 근접한 문인으로, 중국현대사의 소용돌이를 뚫고 살아가는 인간의 삶의 적나라한 실상을 대륙적인 입심으로 장엄하게 풀어가는 통렬한 재미를 주는 소설가로 정평이 나 있다. 문학부문 공동 수상자인 이근배 시인은 신춘문예 5관왕이라는 것이 입증하듯 천재적인 문재로 한국시의 뿌리인 시조와 자유시의 큰 물결을 하나로 아우르는 독보적인 시세계로 일가를 이뤘다는 점이 높은 점수를 받았다.

심사위원회는 “최근 동남아시아에서 인권 문제 등의 이슈가 빈발하고 있는 만큼 올해의 수상자는 네팔과 스리랑카, 중국 등 아시아 출신 인물 가운데에서 선발하게 됐다”며 “각계에 좋은 후보들이 다수 추천되어 올해에도 세계 어떤 상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만큼의 훌륭한 분들을 수상자로 선정하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고 밝혔다.

만해대상 시상식은 오는 8월 12일 강원도 인제 백담사 만해마을에서 열리는 만해축전 기간 중에 시행된다. 상금은 각 3000만원이다.

부문별 만해대상 수상자의 이력은 다음과 같다.

*만해대상 평화부문 수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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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이랄라 대표
성명 : 아누라다 코이랄라

생년 : 1949년 4월 14일생(62세)

소속 ; 마이티네팔재단 대표

아누라다 코이랄라(Anuradha Koirala)는 네팔 카트만두에 소재한 마이티 네팔(Maiti Nepal) 재단이사장이다. 그녀는 네팔의 성노예소녀들의 인권을 지키는 파수꾼이다. 전직 영어선생인 그녀는 여성과 소녀들의 성노예에 대해서 투쟁을 벌이는 인권운동가이다. 그녀는 이런 공로로 다수의 상을 수상했다.

2004년 2005년 네팔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연속 선정, 2005년 세계평화종교연합 평화 대사(Ambassador for Peace) 2007년 스페인 소피아 여왕상 은메달 2008년 UN 네팔 여성위원회 감사패 2010년 CNN 올해의 영웅 선정 등이 그것이다.

그녀가 이렇게 주목 받고 있는 것은 위험과 개인적 희생을 무릅쓴 활동 때문이다. 그녀의 활동은 범죄와의 전쟁이며 또한 인도와 네팔의 정치적으로 매우 상층레벨에서 연계되어 있기 때문에 위험부담을 안고 이런 운동을 전개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가 특히 인도로 성노예추방미션 여행을 할 때는 보디가드들의 호위를 받지 않고서는 다니기가 어려울 정도로 신변의 위협을 받고 있다.

그녀의 이 같은 헌신적인 활동을 본 많은 자원봉사들이 그녀의 활동을 돕고 있다. 많은 자원봉사자들은 젊은 여성과 어린 소녀들로 하여금 성매매로부터 벗어나도록 구조하여 건강하게 일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다. 아누라다 코이랄라는, ‘사회는 나의 활동을 거부하지만, 그녀들은 자원봉사자들의 자매들이 공포의 희생물이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나에게는 큰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그녀는 ‘어린 소녀들은 나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다.’라고 덧붙인다.

‘마이티 네팔 선우’는 미국에서 활동하면서 마이티 네팔을 돕고 있다. 마이티 네팔 선우는 브릿지 카잘리스 콜린즈(Brigitte Cazalis-Collins)가 이사장을 맡고 있으며, 마이티 네팔의 성 밀매와 인권전쟁을 돕는 단체로서 미국에 있다. 마이티 네팔 선우는 2001년 미국 매사추세츠에서 180개의 비영리 단체들이 참가하여 발족된 단체이다. 브릿지 카잘리스 콜린즈 부부는 미국과 네팔에서 활동을 벌이고 있는데, 특히 미국에 이민 온 티베트 난민들을 돕고 있으며, 미국에서 네팔의 성 밀매의 문제점을 제기하면서 각성을 촉구하는 활동을 활발하게 벌이고 있다.

아누라다 코이랄라는 성노예로 학대받는 여성과 소녀에게 구세주 역할을 한다는 공로로 2010년 미국 CNN 방송의 '올해의 영웅(Hero of the Year)'에 선정됐다. 그녀는 8주간 진행된 온라인 투표 결과 최종 10명의 후보 가운데 최다 득표의 영예를 안았는데, 아동 성노예 근절을 위해 남편 애슈턴 커처와 함께 '데미 앤드 애슈턴 재단'을 운영하고 있는 영화배우 데미 무어는 코이랄라에 대해 "그녀는 '우리 소녀들을 팔지 말라'고 외친다. 그녀는 사창가와 인도-네팔 국경지대를 돌아다니며 매춘을 위해 끌려가는 소녀를 구 한다"고 소개했다.

무어는 계속해 코이랄라가 인권단체 '마이티 네팔'을 이끌며 1993년부터 지금까지 1만 2천 명 이상의 여성과 소녀를 구했다면서 코이랄라는 단순 구조를 넘어 의료와 교육, 애정을 제공하는 안식처를 만들었다고 강조했다.

‘어머니의 집’이라는 뜻의 마이티 네팔은 인신매매 피해 여성들의 구호·재활 단체다. 방 2개로 시작한 마이티 네팔을 29개 국내 지부와 전 세계의 후원 네트워크를 갖춘 조직으로 이끈 아누라다 코이랄라(61)가 폭력과 인신매매에 노출된 여성들에게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개인사에서 비롯됐다. 남편의 구타로 세 번이나 유산을 했지만 누구에게 하소연해야 할지 몰랐다. 폭력 희생자들에게 법률 조언을 해주고 재활을 돕는 것이 마이티 네팔의 출발이었다.

사업은 인도에 성노예로 팔려가는 어린 네팔 소녀들을 구조하는 것으로 확장됐다. 마이티 네팔은 성매매 업소를 급습하거나 국경을 순찰하면서 인신매매 피해자들을 구조하고 네팔로 돌아온 피해자들에게 쉼터와 재활 교육을 제공하고 있다. 빈털터리에 병들고 아이까지 딸린 상태로 귀향하더라도 현실은 냉혹하다. 코이랄라는 “가족은 딸이 돌아온 것에 대해 기뻐하지만 사회는 그렇지 않다”며 “이 소녀들이 교육을 통해 먹고살 길을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마이티 네팔에서 기초교육과 함께 구슬로 된 팔찌, 가방, 지갑 등을 만드는 방법을 가르치는 이유다.

코이랄라는 지난해 말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CNN방송국에서 진행된 시상식에서 ‘올해의 영웅’에 선발됐다. 이번 시상은 10명의 후보를 놓고 지난해 9월23일부터 11월18일까지 실시한 인터넷 투표 결과에 따른 것이다. 코이랄라는 CNN이 뽑은 10명의 최종후보 가운데 누리꾼들의 투표에서 최다득표를 했다. 네팔의 대표적인 인권운동가이자 93년도에 설립된 Maiti Nepal 재단의 설립자인 그는 인도 등지에 성노예로 팔려가는 1만2천여 네팔 소녀들을 구출한 공로가 인정된 것이다.

아동 성노예 근절을 위해 남편 애슈턴 커처와 함께 ‘데미 & 애슈턴 재단’을 운영하고 있는 영화배우 데미 무어는 코이랄라에 대해 “그녀는 ‘우리 소녀들을 팔지 말라’고 외친다. 그녀는 사창가와 인도-네팔 국경지대를 돌아다니며 매춘을 위해 끌려가는 소녀를 구한다”고 소개했다. 데미무어는 “코이랄라가 인권단체 마이티네팔재단을 이끌며 1993년부터 지금까지 1만2천명 이상의 여성과 소녀를 구했다”면서 “코이랄라는 단순 구조를 넘어 의료와 교육, 애정을 제공하는 안식처를 만들었다”고 강조했다.

코이랄라는 올해의 영웅 선정식에서 “인신매매 없는 사회를 만드는 데 동참해 달라. 이는 우리의 딸들을 위한 일”이라고 호소했다.

1만명이 넘는 후보군 가운데 10명의 영웅에 꼽힌 인물에는 코이랄라 외에 여성 전과자들의 자활을 돕고 있는 미국의 수전 버튼(여), 인도 고아와 빈민을 지원하는 나라야난 크리슈난, 캄보디아 지뢰제거에 앞장서온 아키 라, 케냐 농촌에 태양광 발전을 보급하는 에번스 와동고 등이 포함됐다.

*만해대상 실천부문 수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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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티아랏치 교수
성명: 시리세나 반다 헤티아랏치(S.B. Hettiaratchi)

생년: 1939년 9월30일

현직: 스리랑카 고고학자(전 국립 스리자예와르데네뿌라 대학교 부총장 )

S.B. 헤티아랏치 박사는 스리랑카의 저명한 역사, 고고학, 사회문화사가 및 불교학자이다. 그는 불교적 환경에서 교육을 받고 소양을 길러오면서도 영국의 현대학문 방법에 의한 동서 신구학문의 내공을 쌓은 학자이다. 싱할라어로의 저서 역서 발표논문 및 신문 잡지 기고문은 제외하더라도, 20여권의 영문 전공저서, 국내외의 학회에서 발표한 80여 편의 영어 논문과 국내외 유명 저널에 70여 편의 영문기사를 기고하여 학문적 업적을 쌓아 온 스리랑카 출신으로 세계적인 석학이다.

그는 스리랑카에서 대학원 석사과정까지의 소정의 교육과정을 마치고 1970년대 초, 런던대의 동양학 및 아프리카 학부에서 세계적인 동양학자인 석학 케스파리스(J.G. de Casparis) 지도교수 밑에서 고도의 학문적 수업을 5년간 쌓아, ‘고대스리랑카의 사회와 문화의 역사(Social and Cultural History)'라는 연구논문으로 철학박사 학위를 수여받고, 귀국하여 대학교수로서 평생, 학문 연구와 강의 그리고 고고학 발굴로 일생을 보냈다. 또 국립 스리 자예와르데네뿌라(Jayewardenepura) 대학교 부총장(당시의 교육법은 대통령이 총장이므로 사실상 총장역할)과 스리랑카 교원연협회 회장을 역임한 교육행정가로서 또한 프랑스 스페인 유네스코 대사를 역임한 외교관으로서도 소임을 무난하게 소화한 인물이다.

하지만, 그의 본업은 역사, 고고학과 불교학이며, 스리랑카 고대 사회와 문화사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동안 <고대스리랑카의 사회와 문화의 역사>를 비롯 20여 권의 중요한 저술을 했으며 80여 편의 논문을 발표함으로써 스리랑카 최고 고고학자로서 위치를 다졌다. 특히 그는 5세기 중국의 구법승 법현이 쓴《불국기 佛國記》에도 등장하여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무외산사(無畏山寺)인 아바야기리 비하라(Abhayagiri Vihara)에 관한 연구가로서 이 방면에서는 제1인자로 정평이 나있다.

불교사와 고고학 연구분야에서 헤티아랏치 박사가 이룩한 성과 중에서 특히 주목할 분야는 그가 유명한 아소카 명문에 새겨진 브라흐미 문자를 해독하는 전문가라는 사실이다. 알다시피 아소카대왕은 고대 인도를 최초로 통일한 위대한 왕이다. 그는 통일전쟁 이후 여러곳에 석주를 세우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보호하는 칙령을 새겼다. 이 아소카 칙령이 새겨진 석주와 암각 등에 발굴된 것은 1세기가 넘는다. 그러나 이 칙령의 문자인 브라흐미 문자를 해독하는 사람은 세계적으로도 몇 명 되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팔리어와 산스크리트어 프라크리티어 외에 고대 인도 언어에 정통한 헤티아랏치 박사의 학문 활동은 세계적으로 주목받았다. 박사는 직접 현장을 방문하여 브라흐미 문자를 확인하고 해독했으며 역사적 사실관계의 확인 등 빛나는 연구에 힘입어 우리는 고대 인도의 정치 경제 종교는 물론이고 특히 불교사의 중요한 사실들을 명확하게 해주었다.

박사는 고대 인도불교가 남쪽으로 전해졌던 최초의 교두보였던 스리랑카 불교유적에 대한 연구에서도 큰 성과를 이루었다. 박사는 브라흐미문자와 스리랑카문자로 되어 있는 고대 스리랑카 명문들도 다 읽고 해독했다. 이런 내용을 전부 보고서로 발표하였고, 책으로 발간한 바 있다. 이 중에는 부처님의 탄생성지인 네팔 룸비니에 있는 아소카 석주를 해독하고 책자도 포함돼 있다.

헤티아랏치박사의 해박한 고대언어에 대한 지식은 고대불교가 남방으로 진출하는 교두보였던 스리랑카 불교유적지 발굴에서 더욱 빛났다. 예컨대 스리랑카 불교의 뿌리인 북부지역의 아누라다뿌라의 유적발굴은 박사에 의해 그 전모가 밝혀졌다. 아누라다뿌라는 스리랑카 최초의 왕도로서 몇 개의 왕조가 성립했다가 교체된 곳이며, 인도의 부파불교인 상좌부가 아소카 대왕의 친자인 아라한인 마힌다 장로에 의해서 최초로 전파된 곳이다. 또 아소카 대왕의 친딸인 아라한 상가미트라 비구니가 부처님 성도(成道)의 상징인 보리수를 부다가야에서 이곳에 이식해 와서 오늘날에는 세계 최고의 보리수로서 보존되고 있다. 이곳은 인도의 승원문화가 시작된 역사의 현장이기도하다.

S.B. 헤티아랏치 박사는 바로 이 고대 아누라다뿌라의 역사와 불교에 정통하며 유적발굴에 직접 참여한 문화인류학에 기초한 고고학자이다. 특히 마힌다 장로가 최초로 불교를 전파하면서 당대의 통치자인 데바남삐야 티사 왕과 만난 미힌탈레 유적과 수천 명의 비구들이 1천여 년 이상 기거했던 승원인 아바야기리 비하라(무외산사)와 마하비하라(大寺) 등의 유적을 발굴했다. 이 두 사원은 1천여 년 동안 인도 스리랑카 고대사원의 전형이면서 인도불교의 적통성에 대한 소-대승의 교리적 논쟁과 갈등을 불러일으킨 곳이기도 하고, 중국의 법현스님이 기록한 이른바《불국기(佛國記)》의 현장이기도 하다.

S.B. 헤티아랏치 박사의 학술적 업적은 이런 문헌자료의 섭렵에 의한 고고학적 발굴과 실증에 의해서 학문적으로 체계화하여 스리랑카 1천 년간의 고대불교유적을 복원하고 당대의 불교전개과정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모국어인 싱할라어의 고어와 팔리어 산스크리트어 아소카 비문 등에 새긴 브라흐미(Brāhmī) 문자를 해독하는 어문학적 소양과 남인도어로서 스리랑카 국민의 15%가 구사하는 타밀어와 영어 불어 등에 능통한 소양을 갖추고 있다. 그는 스리랑카는 물론 인도 동남아 유럽에 널리 알려진 학자이면서 2003년부터는 한국에도 몇 차례 방문하여 강연을 했고, 지금은 1년에 두 차례 한국의 한 불교대학에서 상좌부불교와 사회에 대해서 강의하고 있다. 만해사상실천선양회에서 주관한 세계시인대회와 세계종교지도자대회에 스리랑카 대표로 참가하기도 했다.

*만해대상 문학부문 수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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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소설가 모옌
성명 : 모옌(莫言)

생년 : 1955년생(56세)

소속 ; 중국 소설가

현대 중국문학을 대표하는 소설가로 해외에 널리 알려진 모옌(莫言, Mo Yan)은 이제 우리나라 독자들에게도 상당히 친숙한 이름이 되었다. 그의 대부분의 주요 작품이 우리말로 번역 소개되어 있는 사실만 보더라도, 그에 대한 문학적 관심이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해볼 수 있다. 그의 본명은 관모예(菅謨業)이나, 글로만 뜻을 나타낼 뿐 “입으로 말하지 않는다”는‘모옌’(莫言)이란 필명을 쓴다.

그는 1955년 중국 산뚱(山東)성 까오미(高密)현 따란향(大欄鄕) 핑안춘(平安村)의 빈한한 가정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5학년 때 문화대혁명이 일어나 학업을 포기하고 수년간 농사일을 거들고 소를 치는 목동 일을 하다가 18세 되던 해에 면화가공 공장에 들어가 직공으로 일했다. 1976년 고향을 떠나 중국 인민해방군에 입대해 복무하던 중 문학에 눈을 떠, 1978년 소설을 쓰기 시작했으며, 해방군 예술학원에 입학, 1986년에 문학과를 졸업했다. 이후 베이징 사범대학과 루쉰 문학창작원에서 문학 석사학위를 취득했으며, 1981년부터 창작 활동을 시작하여 인민해방군 총참모부 소속 1급 작가로 일하다가 1997년 사임하고, '검찰일보'에 재직하면서 작품 활동을 계속했다. 1981년 격월간지『연지(蓮池)』에 단편소설 「봄밤에 내리는 소나기(春夜雨霏霏)」로 등단한 그는 1984년 발표한 「황금색 홍당무(金色的紅蘿蔔)」(1985년 「투명한 홍당무(透明的紅蘿蔔)」로 개작)가 좋은 평가를 얻게 되면서 문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1987년 대표적인 장편소설 『홍까오량 가족(紅高粱家族)』을 발표해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고, 그 작품의 일부를 장이머우(張藝謨) 감독이 영화 '붉은 수수밭'으로 제작해 1988년 베를린 영화제에서 황금곰상을 수상하면서 모옌의 작품이 전 세계 20여 개국으로 번역 출간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장편소설 <열세 걸음(十三步)> <술의 나라(酒國)> <풀을 먹는 가족(食草家族)> <풍유비둔(豊乳肥臀)> <티엔탕 마을의 마늘종 노래 天堂蒜薹之歌> <사부님은 갈수록 유머러스해지신다(師傳越來越幽黙)> 등을 연달아 발표하였고, <환락>을 비롯한 주목할만한 중단편소설을 발표하며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위에 열거한 작품 중 <사부님은 갈수록 유머러스해진다>는 장이머우 감독에 의해 영화「행복한 날들(幸福時光, Happy Time, 2000)」로 제작되어 호평을 받았다. <풍유비둔>은 그 특유의 능란한 소설화법을 한껏 즐길 수 있는 빼어난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티엔탕 마을의 마늘종 노래>는 1980년대 중국의 개혁 개방의 전성기를 배경으로 농촌 마을과 관료 사회의 부패 양상을 탁월한 주제의식과 기교로 그려낸 수작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 외에도 많은 희곡과 텔레비전 드라마 극본을 썼는데, 1997년에 발표한 희곡 「패왕별희(覇王別姬)」는 무대에 올려져 중국 대도시를 중심으로 2개월간 연속 공연되면서 대중들에게 큰 인기를 끌기도 했다. 1993년에 출간된 『술의 나라』는 프랑스, 독일, 일본 등 여러 나라에 소개되어 큰 호평을 받았고, 중국 최고의 문학상인 따자(大家)문학상을 비롯, 프랑스 루얼 파타이아 문학상, 이탈리아 노니로 문학상, 프랑스 예술문화훈장, 홍콩 아시아문학상, 일본 후쿠오카 아시아 문화대상 등을 받은 바 있다. 30여 년 동안 자신의 고향인 산뚱성 까오미현 둥베이(東北)를 주요 무대로 소설을 창작해 온 그는 현재 중국어권 작가 중 가장 유력한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

모옌 문학의 매력은 중국현대사의 소용돌이를 뚫고 살아가는 인간의 삶의 적나라한 실상을 대륙적인 입심으로 장엄하게 풀어가는 통렬한 재미에 있을 것이다. 중국적인 허풍과 과장을 유감없이 발휘하면서 전개하는 기상천외한 상상력의 세계는 어떤 의미에서 콜롬비아의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인 가브리엘 마르께스의 마술적 리얼리즘의 세계와 일맥 상통하는 바가 있다.

특히 그의 출세작인『홍까오량 가족』과 마르께즈의 『백년 동안의 고독』을 대비 분석한 비교문학적 연구가 행해지고 있음을 볼 때, 모옌 문학이 중국적 전통의 테두리 안에만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세계문학의 보편적 차원에서 창작된 지극히 현대적인 것임이 확인된다. 활달한 입심의 이야기꾼인 모옌의 장기(長技)가 돋보이는『인생은 고달파』는 여러모로 주목되는 작품이다. 중화인민공화국의 탄생 무렵(1950년)부터 2001년까지 약 반세기에 걸친 중국현대사를 가로지르면서, 작가 자신의 고향인 산뚱성 까오미 현의 농민들과 그 후손들이 역사의 질곡 속에서 어떻게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두 극단적 체제를 뚫고 나가는지를 능청스런 문체로 거침없이 묘사해 보여준다.

악덕지주로 몰려 총살당한 서문촌의 지주 서문뇨가 나귀, 소, 돼지, 개, 원숭이, 사람으로 거듭 환생하면서 이야기를 펼쳐나가는 이 소설은『삼국연의』나 『수호전』과 같이, 중국의 전통적인 장회체(章回體) 형식을 취하고 있다. 50년이라는 장대한 역사를 다면적 시각으로 폭넓게 그리기 위해 ‘윤회’라는 불교적 상상력을 끌어들인 점도 치밀하게 계산된 서사전략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또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1인칭 시점(視點)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음에도,‘나’가 육도윤회의 과정을 거치는 구성형식을 택함으로써, 마치 전지적(全知的) 3인칭 화자의 시점으로 묘사하고 있는 듯한 다성적(多聲的) 효과를 거두고 있는 점이다. 윤회의 순환체계에 착안하여, 중국 현대사 50년의 소용돌이를 헤쳐온 인간들의 고투(苦鬪)를 장쾌하게 드러내 보여주는 작가적 역량은 높은 평가를 받기에 충분하다.

모옌은 최근 들어 한국에서 개최하는‘동아시아 문학포럼’‘한중 문학인대회’세계작가 문학포럼’등에 계속 초청되어 한국작가들과의 연대감정도 열정적으로 나누어 갖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친한파 작가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는 무엇보다도 미국 작가 토마스 잉게(M. Thomas Inge)가 극찬했듯이,“노신(魯迅)과 노사(老舍) 이후 가장 전도유망하고 개성 있는 세계적인 중국 작가”로서, 아시아 문학의 위상을 세계에 알리는데 크게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

*만해대상 문학부문 수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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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배 시인
성명: 이근배(李根培)

생년; 1940년 3월 1일

현직; 시인,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 신성대학 석좌교수

한국시의 뿌리는 시조에 있고 현대시는 그 뿌리로부터 잎과 꽃과 열매를 맺으며 자라고 있다. 이 땅의 현대시 100년 역사는 시조와 자유시의 두 큰 그릇으로 뻗어간다. 이근배는 한국시의 정체성인 시조와 자유시의 큰 물결을 하나로 잇는 독보적 시인이다.

1961년 경향, 서울, 조선, 신춘문예에 시조로 당선한 이후 1962년 동아(시조) 1962년 조선(동시)· 1963년 제2회 문공부신인예술상 시부 수석상, 시조부 수석상· 1964년 한국일보 시 당선, 1964년 제3회 문공부신인예술상 문학부 특상(시)으로 60년대의 개막을 시조, 시, 동시 등으로 징소리를 낸 이후 올해로 시력 50년을 맞는 동안 시조와 시쓰기에 쉬임없이 붓을 달려왔다.

등단과 함께 ‘신춘시’동인으로 60년대 자유시단의 중심으로 나서는 한편 한국시조시인협회 창립이사(64), 한국문인협회 시조분과위원장(73)으로 선두에서 현대시조의 중흥을 이끌어 시조인구의 확장과 시조의 위상을 높이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저 엄혹한 군사통치하의 문예지 기근시대에 월간 <한국문학>을 발행, 주간을 하며 7·80년대 한국 문학의 넓은 땅을 개간하였으며 1984년에는 신문사상 최초로 장편서사시 <한강>을 1년간 한국일보에 연재, 노산 이후의 대문장이라는 평을 얻기도 하였다.

시조로는 가람, 노산, 조운의 맥을 잇고 자유시로는 만해, 지용, 미당의 시정신을 담아내며 민족적 화두를 우리네 고유의 가락으로 엮어내는 그의 활달한 시세계는 마침내 아직 누구도 해내지 못했던 한국시조시인협회장(94)과 한국시인협회장(2002)을 맡아 시조와 자유시가 둘이 아니고 하나임을 입증하는 큰 몫을 해낼 수 있었다.

면암(勉菴) 문하의 거유(巨儒) 장후재학사의 외손자이며 유학자 이각현공의 손자로 어려서부터 유가의 학풍을 익혀왔으며 수덕사, 마곡사 등 대가람을 기도처로 불공을 올린 조모의 영향으로 불심을 키워 토함산 불국사 석굴암 통일대종의 명문을 쓰게 되었고 이후 명산대찰의 모연문 비문 등을 지어내어 설악산 신흥사 사문으로 법계를 받기도 하였다.

2006년 현대시조 100년의 해를 맞아 만해축전의 대표 행사인 세계민족시대회 집행위원장으로 민족시 국제 심포지엄을 최초로 주관했고 고유제, 시조시화전을 여는 한편 또한 문단사에 처음으로 대표 현대시조를 작곡, KBS홀에서 연주회를 갖는 등 현대시조 100년의 장엄한 대축제를 성공적으로 열기도 하였다.

서울예술대학, 동국대, 중앙대, 추계예대 등 대학 강단에서 시창작 강의로 이름이 높았으며 재능대 초빙교수를 거쳐 현재에도 중앙대 예술대학원 석박사 통합과정의시창작 강의를 맡고 있으며 신성대학석좌교수로 칠순이 넘는 나이에도 강단에 서고 있다.

첫 시집 <노래여 노래여>는 시쓰기의 본보기 교재로 널리 읽혔으며 시조집 <동해바닷속의 돌거북이 하는 말>은 현대시조의 한 전범을 보여준다. 국가의 대사와 언론, 문화계의 주요 행사시를 모은 기념시집「종소리는 끝없이 새벽을 깨운다」는 이근배의 시적 역량의 절정을 이루고 있으며 중앙일보에 3년에 걸쳐 전면으로 연재했던 <시가 있는 국토기행>은 이 땅의 시의 백두대간을 새롭게 개간한 역저로 꼽힌다.

신문학 이후 문단사의 큰 스승을 모시는 일에도 앞장서서 지용회회장을 역임했으며 오늘까지도 공초숭모회회장, 사단법인 심훈 상록수 기념사업회 공동대표, 만해시인학교교장으로 일하고 있다.

인류의 언어 가운데 가장 위대한 우리의 모국어를 시와 시조의 틀에 얹혀 독창적인 자기세계를 이룬 시인 이근배의 시력 50년이 이룩한 상찬할만한 기록은 이루 적기 어렵다. 중앙시조대상, 가람문학상, 한국문학작가상, 육당문학상, 현대불교문학상, 유심작품상, 시와시학작품상, 고산문학상 등을 수상했으며 문인으로서의 최고의 영예인 대한민국예술원회원(2008)에 선임되었음은 그의 문학적 성취와 더불어 문학사에 끼친 공적과 품성의 순열함을 공인받는 결과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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