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에 대한 실망을 드러내며 결별을 선언한 독일 불이선원장 현각스님이 ‘조계종을 떠난다고 한 적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하버드대 출신으로 숭산스님을 은사로 모시고 출가한 현각스님은 지난 7월31일 한 일간지에 보낸 이메일을 통해 “(자신의) 말의 뉘앙스가 완전히 오해됐다”면서 “(조계종이나 한국불교를 떠난다는) 결정이 없다는 걸 알게 될 것”이라고 전했다.

이에 앞서 현각스님은 지난 7월28일 SNS에 올린 글을 통해 “8월 한국을 방문해 화계사로 가서 은사 스님의 부도탑에 참배하고 지방 행사에 참석한 뒤 한국을 떠날 준비를 하겠다”고 소회를 밝힌바 있다. 이 글에서 현각스님은 “주한 외국인 스님들은 오로지 조계종의 ‘데커레이션’(장식품)”이라며 “이게 내 25년간 경험이다. 참 슬픈 현상”이라고 토로했다. 현각스님의 글이 알려진 이후 주요 언론이 대대적으로 보도하면서 교계 안팎의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파문이 일자 현각스님은 7월31일 한 일간지에 보낸 메일을 통해 “서양에서의 명상에 큰 관심을 집중하겠다는 것을 알리고자 했다"면서 "앞으로 내 스승(숭산스님)의 일을 서양, 특히 유럽에서 이어갈 것"이라고 밝혔다.

한편 현각스님의 SNS 글이 알려진 후 비판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중앙승가대 교수 자현스님(제4교구 본사 월정사 교무국장)은 7월31일 본인의 페이스북 계정을 통해 “현각(스님)의 비판은 외국 승려가 얼마나 이기적인 시각에서 한국 문화를 보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면서 “더구나 (한국에) 25년이나 살고도 우리 전통문화를 존중하지도 문화적 다양성을 갖추지 못했다는 것은 그가 얼마나 자기 우월주의에 빠진 사람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비판했다.

또한 자현스님은 “기복주의, 스님과 신도의 차등은 모든 종교에서 확인되는 부분으로 조계종만의 문제적 특징은 아니다”면서 “스님과 신도의 차등은 종교집단에서는 당연하다. 세상 어느 종교에서 성직자와 신도가 평등관계를 유지하고 있는가?”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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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각스님의 비판에서 느껴지는 아쉬움 (1) (불교신문 16/08/02)
 

한국문화 비판에 대한 단상

 

 

숭산스님의 제자로 예일대를 졸업하고 하버드대에서 수학한 현각스님(독일 불이선원장)이 SNS를 통해 한국불교에 대한 실망을 드러낸 이후 교계 안팎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현각스님은 7월28일 SNS에 “8월 한국을 방문해 화계사로 가서 은사 스님의 부도탑에 참배하고 지방 행사에 참석한 뒤 한국을 떠날 준비를 하겠다”고 소회를 밝혔다. 그러나 현각스님은 7월31일 한 일간지에 보낸 이메일을 통해 “(자신의) 말의 뉘앙스가 완전히 오해됐다”면서 “(조계종이나 한국불교를 떠난다는) 결정이 없다는 걸 알게 될 것”이라고 전했다.

현각스님 입장이 사회적 파장이 일고 있는 가운데 중앙승가대 교수 자현스님이 SNS를 통해 “현각(스님)의 비판은 외국 승려가 얼마나 이기적인 시각에서 한국 문화를 보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면서 “더구나 (한국에) 25년이나 살고도 우리 전통문화를 존중하지도 문화적 다양성을 갖추지 못했다는 것은 그가 얼마나 자기 우월주의에 빠진 사람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비판했다.

본지는 현각스님에 대한 자현스님의 입장을 보다 상세히 듣기 위해 원고 집필을 부탁했다. 그 가운데 첫 번째 원고를 싣는다. <편집자>

  
  자현스님

무더위 속에 현각스님이 페이스북에 올린 한국불교에 대한 비판이 큰 파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SNS가 가지는 개인성과 공동성이라는 이중구조의 무서움이 단적으로 드러나는 사건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철학을 전공한 사람으로서, 나 역시 ‘비판적인 유희’를 즐기는 사람이다. 그러나 현각스님의 비판은 25년 이상 화두선을 한 선승으로는, 너무 무디다는 점에서 놀랍다. 새로운 뼈아픈 지적이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다. 또 오랜 시간을 우리나라에서 살았음에도, 한국문화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 역시 무척이나 흥미롭다.

현각스님의 비판논점을 정리하면, ‘①유교적 관습·②남녀·국적 차별·③형식주의·④기복祈福주의·⑤스님과 신도의 차등·⑥외국승려는 장식품’이라는 총 6가지이다. 이 중 ①②③은 한국문화라는 큰 범주 속의 불교비판이며, ④⑤⑥은 불교만 해당되는 비판이다. 이 중 본고에서는 먼저 한국문화 속의 불교비판 부분만을 다루어 보고자 한다.

①②③은 조선을 거친 성리학문화에 따른 한국문화적인 특징이 불교에도 잔존하는 부분이다. 그러므로 이는 불교비판이라기 보다는 한국문화 비판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사실 나는 ④⑤⑥의 불교비판보다, 오히려 ①②③의 한국문화에 대한 비판이 더 실망스러웠다. 한국문화니까 무조건 옳다는 의미는 아니다. 우리 역시 유교문화의 문제점을 시정하려는 노력을 지속적으로 전개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한국을 선택한 외국인으로서 25년 이상을 산분의 비판으로는, 이것이 자기 우월주의와 문화적 독선에 빠져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즉 미국우월주의 속에서 우리의 전통문화에 대한 존중의 자세 없이 살아온 흔적이 고스란히 읽히는 대목인 것이다.

현각스님은 제대로 한국말도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하버드라는 유교문화 속에 존재하는 사대주의와 학벌주의에 의해서 일약 스타덤에 오른 분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당신이 비판한 유교문화가 스님의 한국불교에서의 위치를 만들어준 셈이다. 덕분에 이분은 모든 승려가 경험하는 한국불교의 낮은 자리를 경험해 볼 기회가 없었다. 즉 현각스님에게 한국불교와 한국이라는 나라는 너무 쉬웠던 것이다. 이것이 현각스님으로 하여금 몸은 한국에 있지만 미국우월주의라는 독선에 갇혀 있도록 한 원인은 아니었을까?

현각스님은 당신의 글이 일파만파가 되면서 사회문제화 되자, 중앙일보에 이메일을 보내 진화에 나섰다. 그런데 그 방어논리가 ‘한국어가 부족해서’라는 것이다. 이게 25년 이상을 한국승려로 산분의 변명이라는 점이 놀랍기만 하다.

우리가 미국이나 유럽 같은 선진국에 가면 그 나라 말을 배우려고 한다. 그런데 동남아나 남미에 가면 그곳의 언어를 배우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것은 내면에 ‘문화적 경시’라는 장벽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현각스님의 한국어 수준 역시 이것을 반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상대국가의 문화를 존중하는 것은 양식 있는 사람으로서는 기본소양일 뿐이다. 불교의 역사를 보면 불교는 언제나 전파된 지역의 전통문화를 존중하고 그 문화와 함께해왔다. 이것이 불교가 화해와 공존의 종교로 불리는 이유이다. 현각스님이 속해있는 선불교 역시 이렇게 만들어진 중국불교 안에 존재한다. 이런 점에서 스님의 한국문화 비판은 한국불교를 넘어서 한국인을 낮추어본 편협한 오만이라는 재비판을 면할 수 없다.

스님의 비판이 조계종이 거듭날 수 있는 뼈아픈 비판이었더라면 더 없이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너무도 범범한 비판이 한국불교의 훼손과 소모성으로만 치닫고 있는 것 같아 못내 아쉽다.

자현스님 = 동국대 철학과와 불교학과 졸업. 성균관대 동양철학 비교철학, 동국대 미술사학 불교건축, 고려대 불교철학, 동국대 역사교육학 한국고대사 전공으로 박사학위 취득. 현재 중앙승가대 불교학부 교수, 제4교구 본사 월정사 교무국장, 조계종 교육아사리, 불교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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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각스님의 비판에서 느껴지는 아쉬움 (2) (불교신문 16/08/03)
 

[기고] 자현스님 '한국불교 비판에 대한 단상'

 

현각스님의 불교비판 중 앞쪽의 3개에는 한국문화에 대한 비판이라면, 뒤쪽의 3개는 한국불교에 대한 지적이다. 이는 각각 ‘④기복祈福주의·⑤스님과 신도의 차등·⑥외국승려는 장식품’이다. 이 3가지는 다시금 ④⑤의 한국불교에 대한 것과 ⑥의 외국스님들에 관한 내용으로 나누어질 수 있다. 이 중 본고에서는 ④⑤에 대한 내용만을 다루어 보고자 한다.

흔히 기복주의가 나쁘다고 말하지만, 사실 종교학적으로 볼 때 기복주의야말로 종교의 가장 내밀한 시원이다. 즉 절대자나 절대적인 힘이 나를 보호해 주기를 바라는 기복이야말로 종교의 기원인 것이다. 기복이 종교의 시작이라는 것은, 이것이 가장 강렬한 생명력을 가졌다는 것을 의미이다. 실제로 한국불교가 조선 500년의 숭유억불시기를 넘을 수 있었던 원동력은, ‘화려한 교학(敎)’도 ‘빛나는 정신문화(禪)’도 아닌 바로 ‘기복’이었다. 이는 우리가 오늘날까지 조석으로 하는 <예불문>의 ‘명훈가피’라는 단어로 유전되고 있다.

내 말은 기복이 반드시 정당하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종교에서 기복은 핵심적인 요소이며, 현재도 모든 종교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것으로 나쁜 측면은 아니라는 말이다. 실제로 불교와 함께 세계종교로 평가받는 이슬람과 기독교는, 신에 대한 기복이 핵심으로 자리 잡고 있지 않은가! 즉 기복이야말로 종교의 시원에서부터 오늘날의 세계종교에 이르기까지 전 종교를 관통하는 키워드인 셈이다.

물론 현각스님의 지적은 ‘기복=돈’이라는 의미였다. 즉 한국불교가 너무 돈을 밝힌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그럴까? 2015년 총 수입이 가장 많은 사찰은, 강남 봉은사로 210억 8700만원이었다. 210억이면 언 듯 많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순수입이 아니며, 봉은사는 수조원의 자산 가치를 포함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시쳇말로 봉은사 주차장에 빌딩만 올려도 임대료가 이것보다 많이 나오는 상황이라는 말이다. 여의도 순복음교회의 1년 수익규모가 수천억이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도 이 정도 금액으로 한국불교가 기복으로 돈을 밝힌다고 비판할 수 있을까? 단언컨대 한국 종교 중 불교는 가장 이익추구가 적은 청정한 종교이다. 즉 현각스님의 비판은 한국불교의 현실을 도외시한 관견管見에 불과한 것이다.

다음으로 스님과 신도의 차등에 대해서 살펴보자. 이 세상에 제사장이 다스리던 시대부터 지금까지 성직자와 신도가 완전 평등한 종교가 존재했는가? 이에 대해서 붓다는 어떻게 생각했을까? 붓다 역시 승가(출가)와 재가를 엄격히 구분했다. 요즘 간간히 나오는, 승가가 4부 대중을 가리키는 말이라는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내가 율장으로 박사학위를 가진 승려로서 말하건 데, 붓다의 승가는 비구(사미)·비구니(사미니·식차마나니)의 2부승가일 뿐이다.

또 출가와 재가에 대한 가르침도 달랐다. 출가자에게는 4성제·8정도·3과설을 주로 가르치셨다면, 재가인에게는 보시·지계·생천의 3론이 일반적인 가르침이었다. 또 보시에 의한 공덕도 재가인보다 출가인에게 하는 것이 더 많으며, 4향4과의 깨침을 얻은 분들이라면 더 크다고 하셨다. 즉 붓다에게서도 승려와 신도의 차등은 존재했던 것이다.

성직자와 신도는 인도자와 인도되는 사람의 관계이다. 이런 점에서 평등이 될 수 없다. 어떻게 선생님이 학생과 평등할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평등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은, 인간의 본성으로서의 평등이라는 의미이다. 마치 우리 모두는 인간이라는 점에서는 평등하지만, 각각의 생김새는 모두가 다른 것처럼 말이다. 이런 점에서 현각스님의 차등에 대한 비판은 불교를 올바로 이해하지 못한 단견斷見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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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불교 싸잡아 비판 부적절…결자해지해야 (불교신문 16/08/04)
 

기고 / 자현스님 - 3. 외국스님들의 처우에 대한 단상

 

 

현각스님의 불교비판은 한국문화적인 측면과 한국불교적인 부분을 범범하게 아우르고 있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현각스님에게 가장 절실했던 비판의 핵심은, 마지막인 외국승려는 장식품이라는 것이 아니었을까? 실제로 현각스님의 6개 비판 중에는 국적 차별문제도 존재한다. 2개가 외국인과 관련된 부분인 것이다.
 
나는 외국승려가 장식품일 뿐이라는 주장에 동의한다. 지난 수십 년간 조계종은 한국불교의 세계화라는 차원에서 많은 부분을 외국스님들에게 배려했다. 그러나 일반사찰에서 스님의 역할은 기도와 불공 및 신행상담과 법문이다. 또 어느 정도 규모가 갖추어진 사찰이라면, 해당 주지는 지역의 유지나 기관장과 교류하며 포교활동을 해야만 한다. 그런데 외국스님들은 언어문제와 한국문화에 대한 이해부족으로 이와 같은 역할들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즉 현재까지의 사찰전통 안에서는 외국스님들이 설 공간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생각해보라. 말이 어눌한 외국스님이 49재를 지내준다면 신도들의 입장은 과연 어떨까? 또 해당지역의 기관장과 교감이 잘될 수 있을까? 언 듯 생각해도 불가능한 일이다.
 
한국사찰에 외국스님의 위치가 존재할 수 없는 이유는 돌이켜 생각해 보면 아주 간단하다. 한국사찰의 구조와 기능은 한국승려에게 맞춰져서 발전한 것으로, 외국스님을 염두에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이 문제는 최근에야 대두된 한국불교의 전혀 새로운 화두라는 말이다. 이 때문에 현재 외국스님들은, 넉넉한 사찰에 무임승차하는 방법 밖에는 달리 대안이 없다.
 
자체적으로 자본을 생산하지 못하는 집단은 발언권을 갖기 어렵다. 종교집단은 상대적으로 자본의 문제만으로 발언권의 유무를 판단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자본을 생산하지 못하면 발언권이 약한 것은 사실이다. 바로 이러한 상황이 외국스님들의 장식화를 초래하고 있는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외국스님들이 좀 더 한국말과 한국문화를 열심히 배우거나, 종단차원에서 이분들에게 특정사찰을 할애해서 지속적으로 후원해주는 방법 밖에 없다. 그러나 두 가지 모두 그리 녹녹치가 않다. 선수행을 하기 위해서 고국을 등지고 머나먼 한국을 찾은 외국승려가 한국어와 한국문화를 주로 배운다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측면이다. 또 특정사찰을 할애해 준다고 해도, 이분들로는 유지가 쉽지 않으므로 누군가는 지속적으로 생활비를 대줘야만 한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이제는 한국스님들이 외국스님을 모시고 사는 역차별이 현상이 전개된다. 즉 쉽게 해법이 도출될 수 있는 상황이 아닌 것이다.
 
현시점에서 이 문제를 해소하는 방법은 지속적인 고민과 대화 밖에는 없다. 왜냐하면 이 부분은 종단도 외국스님들도 모두 생소한 처음 겪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또 외국스님은 보다 모범적인 생활을 통해서, 적은 숫자임에도 집단의 필연성이 보다 강하게 드러날 수 있도록 할 필요가 있다.
 

나는 조계종이 외국스님들에게는 나름 많은 배려를 해주었다고 생각한다. 그랬기 때문에 현각스님이 한국불교를 일거에 싸잡아 비판하는 오늘날과 같은 상황도 초래될 수 있었던 것이다. 현각스님은 이번 사건이 일파만파로 확산되자, 한국어 부족에 따른 오해라고 해명했다. 그러나 이미 불붙은 숭례문처럼, 다종교 사회 속에서 한국불교는 거칠게 타오르며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그렇기 때문에 설령 현각스님의 말처럼, 그것이 오해에 의한 것일지라도 조속히 돌아와서 참회하는 결자해지의 성숙한 모습을 보였으면 한다. 이것이 당신이 25년 이상 몸담았던 종단에 대한 예우이자, 도덕적 지성의 책임 있는 태도라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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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점 없는 상처내기는 이제 그만 (불교신문 16/08/04)
 
기고 / 현각스님의 비판에서 느껴지는 아쉬움 (4)
지금은 중·고등학교에서 급식이 일반화되어 있지만, 우리 때만 해도 점심하면 당연히 도시락이었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한 반에 꼭 1-2명은 도시락 없이 포크겸용 숟가락 즉 포카락만 달랑 가져온다는 것이다. 이들은 이 막강한 무기로 점심시간 내내 반을 휘젓고 다니면서 한 숟갈씩 얻어먹는다. 말 그대로 십시일반인데, 재미있는 결과는 이들이 가장 많이 먹게 된다는 점이다. 이런 풍경은 우리세대에는 또 하나의 정겨운 일상이었다.
 
그런데 만일 어떤 학생이 전학을 와서 이렇게 3년을 보낸 뒤에 졸업할 때가 돼서, ‘, 니들 음식은 더럽게 맛도 없는데, 내가 참고 먹어 준거야. 도저히 수준 떨어져서 못 먹겠는 걸, 토하려다 참고 먹어 줬으니 감사해라고 했다면 반 학생들은 어떤 기분이들까? 내가 현각스님의 비판에서 받은 느낌이 바로 이런 것이었다.
 
현각스님이 주목받은 것은 깨달음이 있어서가 아니다. 출가하자마자 무슨 깨달음이 있었겠는가? 그것은 단지 하버드를 졸업한 미국의 백인이라는 측면이 작용한 결과였을 뿐이다. 이것은 불교가 출가이전의 사회적인 모든 가치들을 버리고 출가해서, 새롭게 시작한다는 측면과도 맞지 않는다. 그럼에도 한국불교는 이 눈 푸른 수행자를 우대하고 최고의 예우를 해주었다.
 
이 부분에서 한 번 생각해보자. 만일 현각스님의 국적이 미국이 아닌 인도나 스리랑카였다면 어땠을까? 또 백인이 아닌 흑인었다면, 우리가 현각스님을 그때처럼 평가할 수 있었을까? 또 만일 하버드가 아니었다면? 나는 전혀 그렇지 않았을 것이라고 판단한다. 이런 점에서 현각스님에게 하버드를 졸업한 미국인이라는 측면은, 도시락 싸오지 않는 아이의 포카락이었던 셈이다.
 
그런 현각스님이 25년이 지난 시점에서 갑자기 한국불교를 싸잡아 비판하며 매도했다. 요점은 한국불교는 유교적인 경직성 속에서 외국인에 대한 차별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의 지적은 일견 타당하다. 그러나 이것은 도덕적인 사람이라면, 그것도 25년을 산 뒤에 할 말은 아니다.
 
나는 현각스님이 이 같은 말을 너무 쉽게 뱉어내는 것에 경악했다. 그것은 한국인과 한국불교를 얕잡아보지 않고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현각스님은 조선시대적인 정신교육에 치중되어 있는 한국불교에 합리주의 바탕에서 자랑했던[자라왔던] 서양사람들은(특히 서양 여자들) 보낼 수 있을까?”’라고 적시했다. 이는 전근대적인 한국불교와 서양의 합리성을 우열의 관점에서 극명하게 대비시키는 것이 아닌가? 물론 이렇게 볼 수는 있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양식 있고 상대를 존중하는 사람이라면, 이것은 절대 입 밖으로 내서는 안 되는 말이다. 왜냐하면 문화는 수평적인 가치이지 수직적인 우열의 대상이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즉 현각스님에게 한국과 한국불교가 얼마나 가벼웠으면 이런 말이 쉽게 나온단 말인가? 그래서 나는 이런 현각스님이 서구의 우월주의에 빠친 독단론자라고 비판하는 것이다.
 
또 현각스님은 문제가 있는 한국불교의 대안으로, 당신이 간여하고 있는 계룡산 국제선원(무상사)을 제시하였다. 이것은 한국불교 전체에 대한 모독이다. 물론 한국불교 역시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는 점진적으로 고쳐 가야하는 뿐들이지 일거에 부정되는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특히 당신 역시 25년이나 한국불교에 몸담았던 사람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런 식의 해법 제시는 전혀 타당하지도 올바르지도 않다.
 

현각스님의 서구 우월주의에 빠진 독선과 사려 깊지 못한 행동으로 인해서, 한국불교는 제대로 된 논점이나 논쟁하나 없이 실로 어이없는 타격을 입었다. 무언가 뚜렷한 문제제기라도 있었다면 이를 계기로 비판과 반성이라도 있었을 텐데, 논점하나 없이 드잡이질만 하는 꼴이 된 것이다. 이점이야말로 이번 사건에서 가장 가슴 아픈 일이다. 또한 현각스님의 싸잡이식 비판과 매도는 대다수 성실하게 수행하는 스님들에게 깊은 상처를 주었다. 이런 점에서 현각스님은 자신의 사려 깊지 못한 행동에 대해서, 반드시 책임질 수 있는 자세를 보여야만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