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화 | [세계일화 1호] 쵸감 트룽파-최초로 서양에 티벳불교를 전하다.-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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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배수민 작성일11-07-08 14:09 조회2,665회 댓글0건페이지주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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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기-1939년 2월 티벳 캄지역에서 태어났다. 가뀨파에서 중요한 인물들인 트룽파 툴쿠들 중 11번째이다. 가뀨파는 티벳불교의 4개 주요 종단의 하나로 선수행을 강조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세첸의 잠곤 콩트룰, 딜고 켄쉐 린포체. 켄포 강사르가 그의 주요 스승이다.
쵸감은 ''법의 바다''를 뜻하고 트룽파는 ''시자“를 의미한다. 가뀨 전통에서 심도 있게 교육을 받았고 트랑구 린포체와 같은 시기에 켄포(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들은 이후에도 친분을 이어갔다. 또한 네 종단 중 가장 오래된 닝마 전통에서도 교육을 받았다. 서로 다른 종파를 통합하고 종파 간 경쟁 없이 모든 귀중한 가르침들을 배우려는 티벳 내 초종파 일치 운동의 신봉자였다.
이미 써르망 사원의 주지로 임명되었던 쵸감 트룽파는 1959년 티벳이 중국 공산주의에 일으킨 봉기가 실패한 해에 달라이 라마를 따라서 망명했다. 이때 나이가 스무 살이었고 자신을 따르는 스님들을 이끌고 걷거나 말을 타고 히말라야 산을 넘어 인도로 들어갔다. 1956-1964년에 달라이 라마의 임명을 받아 인도 달호우지에서 어린 라마들의 정신적 조언자로 활동했다.
#서양에서의 초창기 가르침-인도 망명시절 영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1963년 온정어린 서양인들의 도움으로 장학금을 받아 영국 옥스포드 대학에서 비교종교학을 공부했다. 1967년 아콩린포체와 함께 스코트랜드의 존스톤 하우스 트러트 초청을 받아 서양인 테라바다 스님인 아난다보디가 떠난 명상센터를 인수받았다. 뒤에 서양에서의 최초 티벳 절 삼예 링이 되었다. 이 절에서 추후 배우이자 음악가가 된 데이빗 보위가 쵸감 트룽파의 명상 제자가 되었다. 1970년 동료인 아콩 린포체와 헤어진 후 몇몇 학생의 초청으로 미국에 갔다.
스코트랜드에서 차 사고 등 다양한 경험을 하게 되었는데, 이 사고로 몸의 왼쪽에 마비가 와 비구계를 포기한 후 일반인 지도자가 되었다. 이 결정은 이국적인 문화와 옷, 스승은 어떠해야 한다는 선입관념에 마음을 빼앗기는 학생들의 유혹을 잘라내려는 의도였다. 미국에 도착하자 북미지역에 다니며 서양인이 알아들을 만한 형식으로 불교의 수준 높은 가르침의 핵심을 전하는 독특한 능력으로 명성을 얻어 갔다. 이 기간에 13개의 바즈라다투 학교를 이끌었고 3개월 안거프로그램으로 집중 안거수련의 분위기 속에서 불교의 광대한 교리를 가르쳤다. 또한 이 학교는 그의 제자들이 지도자가 되도록 교육하는 중요한 기능도 했다.
#금강승의 소개 -트룽파는 금강승의 비밀 수행을 서양에 도입한 최초 지도자의 한 명이다.켄포 출트림 감초에 의하면 ''금강승을 서양에 주로 소개한 사람이 트룽파 린포체다.'' 비밀수행이 주로 승가에서 행해졌던 티벳 전법 방식과는 다르게 트룽파는 금강승을 일반인 제자에게 소개했다.
#선과 교육 센터 -1973년에 북미에 있는 모든 기관을 포함하는 바즈라다투를 콜로라도 보울더에 본부를 두고 설립했다. 세계적으로 100여 개의 선센터를 세웠는데 원래 다르마다투로 알려졌으나 지금은 샴발라 선 센터이며 150여 개이다. 레드 패더 레이크에 있는 집중 선 수련을 위한 샴발라 마운틴 센터를 포함한 안거 도량도 세웠다.
1974년에 트룽파는 나로파 학원을 세웠는데 나중에 불교 대학으로는 최초로 인가를 받은 나로파 대학이 되었으며 콜로라도 보울더에 있다. 알렌 진스버그가 시를, 윌리엄 버로우가 문학을 가르치도록 했다. 다수의 눈에 띄는 제자들을 두었는데 페마 초드론,알렌 진스버그 등이 있다.
#샴발라의 목표 -트룽파는 1976년에 일련의 세속적인 가르침을 주었는데 이들이 모여 샴발라의 수련으로 제시되었다. 전설적인 왕국 샴발라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다. 개인적인 깨달음이 신비스럽지 않을뿐더러 깨친 사회를 상징하는 샴발라 왕국이 실제로 실현 가능하다는 것이 그의 견해이다. 샴발라 비젼의 수행은 정념/알아차림 명상을 개인의 선함과 확신에 가닿는 방법으로써 사용하는 것이다. 존엄, 확신, 그리고 지혜를 삶의 모든 면에 적용하기 위한 길로써 제시되었으며 깨친 사회는 삭용(땅의 수호자)인 그 자신에 의해 이끌어질 것이다.
샴발라 비젼은 선에 뿌리를 두고 어느 누구나, 종교가 없는 이들도 다가갈 수 있는 비종교적 접근으로 설명된다. 샴발라의 조건에서는 순간순간 깨친 사회 건립이 가능하다. 그의 책 ‘샴발라, 전사의 성스러운 길’에서 샴발라의 견해를 상세히 모아 제시한다. 트룽파에 의하면 샴발라 왕국을 널리 알리려는 원력이 고국을 떠나 인도로 그리고 서양으로 가열찬 여행을 하는데 필요한 동기를 제공했다고 한다.
#예술과 과학과의 작업 -미국 거주 초창기부터 트룽파는 선적 접근을 매일의 일상생활에 실현할 것을 열정적으로 독려했다. 다양한 전통 선 수행을 일반 모임에서도 할 수 있게 했으며, 제자들이 가지는 기존의 여러 특별한 관심을 반영해서, 다양한 과목에 어떻게 선적인 방법으로 접근할 것인가에 대한 전문화 된 가르침으로 발전시켜 나갔다. 궁도, 서예, 꽃꽂이, 다도, 춤, 연극, 영화, 시, 건강관리 그리고 심리치료 등이 이 과목에 포함되었다. 그의 말을 빌리면 그의 목표는 "예술을 일상의 삶에 가져오는 것"이며 1974년에 이러한 활동을 위한 통솔기구로써 나란다 재단을 만들었다.
#열반-1986년 9월 28일 트룽파는 젊었을 때 일어난 차 사고 등으로 건강이 나빠져 심장마비가 왔고, 이 결과 상황이 더욱 악화되어 병원과 집에서 집중적인 치료를 받았으나 결국 1987년 4월 간경변증으로 열반했다. 열반 후 닷새 동안 삼매에 들어 있었고. 몸은 곧 부패하지 않았으며 심장이 따뜻한 채 있었다고 알려졌다. 그의 몸은 소금에 넣어 나무관에 안치되어 카르메 촐링에 인도되었다. 다비식에 참석한 많은 사람이 옛날부터 깨달음의 표시로 생각되는 대기 현상과 여러 상징들이 있었다고 전했다. 무지개가 나타나고, 독수리의 공중 회전, 생명기운의 뭉침 같은 한 덩어리 구름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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