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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 | 미산 스님의 "나의 출가수행 이야기' (현대불교 09/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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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리틀붓다 작성일09-04-11 20:16 조회2,15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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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산 스님의 ‘나의 출가수행 이야기’

가는 곳마다 주인되기… 간절한 마음 이어져야

생사문제 해결하는 것이 참선이라는 말에 선방 정진
수행이론과 실제 정리 위해 학문과 각종 수행 섭렵해

경제적 어려움으로 정신적 공황에 시달리는 이들이 많아지면서 간화선 등 명상에서 해법을 찾는 이들이 늘고 있다. 이들은 물론 자기 반조(返照)로 ‘참 나’를 찾던 이들의 수행은 동안거 해제 후에도 그칠 줄 모른다. 수행으로 삶의 고통을 녹여 온 불자들의 열기는 2월 14일 공주 마곡사 연화당을 가득 채운 200여 사부대중의 모습에서도 찾을 수 있었다.
불교학연구회(회장 본각)는 2월 14~15일 공주 마곡사에서 ‘명상, 이 뭣고?’를 주제로 겨울워크샵을 개최했다. 간화선과 위빠사나 관련 불교학자 10인이 발표한 행사는 그간의 간화선과 위빠사나 수행에 관한 토론회와는 달리 실질적인 수행경험과 실천방법에 대한 의견을 나누고자 마련됐다. 이 자리에서 미산 스님(중앙승가대 교수ㆍ상도선원장)은 ‘나의 출가수행과 이 뭣고 화두’를 주제로 출가수행담을 발표해 눈길을 끌었다. 관련기사 7면
발표에 앞서 미산 스님은 “현재 나를 지탱해 주는 것은 어려서의 정진에 대한 순수한 열정과 생사문제의 해결에 대한 간절한 염원이 아닌가 한다”고 말했다. 이어 스님은 “초발심을 바탕으로 한 정진의 삶은 든든함과 더 큰 원력을 갖게 해준다”고 말해 발심과 정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미산 스님의 출가수행담을 소개한다. 조동섭 기자

어려서부터 총명하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그런데 몸이 약했다. 집에 있으면 단명해 스물 안에 죽을 수 있으니 스물까지만 절에서 살라면서 부모님이 열두 살 때 백양사로 보냈다. 절에서 어릴 적 별명이 생영감 혹은 다섯 개의 완두콩이었다. 다른 아이들과 달리 조숙해 말과 행동이 어른스러웠던 모양이다. 속명이 김완두이기에 학교에선 완두콩이라 놀림 받았다. 지인들은 나의 둥실둥실한 성격과 외모에 이 별명이 잘 어울린다고 말한다. 중학교 2학년 어느 날, 백양사 주지스님이 입적한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내가 스물 안에 죽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현실로 나타난 것 같아 방안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스물을 넘기지 못하고 저런 죽음을 맞게 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도저히 학업을 지속할 수가 없었다. 그때 선방에서 공부하던 스님을 통해 “나고 죽는 생사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참선”이라는 소리에 학교도 그만두고 무조건 선방스님을 따라나섰다. 물론 은사스님의 반대가 있었지만 장대비가 쏟아지는 어느 초여름 날 선방스님과 도망치듯 첫차를 타고 김용사로 가 다시 삭발을 하고 금선대라는 암자로 가서 몇몇 수좌스님들과 정진을 시작했다.
집에서도 찾아 나섰고 학교에서도 난리가 났다. 하루는 암자에서 큰절로 내려가니 선생님을 비롯해 60여 명의 급우로부터 편지가 왔다. 아이들이 한결같이 기다리고 있으니 돌아와 같이 공부하자는 내용이고, 선생님은 절 생활이 어려워 나간 줄 알고 자기 집에서 학교를 다니라는 따뜻한 배려가 담긴 위문편지였다. 그러나 당시는 그러한 내용이 왜 그리 세속적으로 들렸는지 몇 개를 읽다가 모두 아궁이 속에 넣어 태워버렸다. 거처가 알려져 부모님을 피해 동화사, 법주사 강원 등으로 갔다. 그런데 강원은 원하지 않는 공부가 너무 많았다. 급한게 생사문제라 이것부터 해결해야 하는데 일어특강, 한문특강 등 죽음 문제와는 무관한 과목만 있는 것 같아 강원도 그만두고 문경 원적암의 서암 큰스님을 찾아갔다. 그랬더니 공양주를 시키시며 밥하는 것 불 때는 것 등등을 자상하게 가르쳐주셨다. 그리고 하루에 아침 저녁 2시간 직접 데리고 앉아 좌선정진을 하도록 하셨다. 나머지 시간은 손잡고 다니시며 나물도 뜯고 밭도 매면서 일상사 속에서 화두를 놓치지 않고 챙기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일깨워주셨다. 불을 때고 있으면 옆에 와서 허리를 쿡 찌르면서 “화두 들어”하고 다그치면 정신이 번쩍 들곤 했다. 이뭣꼬 화두를 처음 받아 참구하며 한철을 신심과 열정으로 짬지게 보냈다. “보고 듣고 숨쉬는 자가 분명히 있는데 이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이뭣꼬? 이뭣꼬?….” 이렇게 일하면서 화두드는 것을 익히고 나서 서옹 큰스님의 회상이었던 봉암사 선원에서 한 철 지내게 됐다. 큰스님의 지도로 계속 정진했다. 이곳에서도 나이가 가장 어리기 때문에 공양주 소임을 맡게 됐다. 현재의 봉암사는 종립선원으로 수좌들도 많고 그 위상이 매우 높지만 1970년대 초반 만해도 집도 몇 채 되지 않았고 주로 참선을 오래한 구참 납자들이 약 20여명 모여 자유롭게 정진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덕망 높은 구참스님들께 공양을 지어 올리는 공덕을 쌓는 좋은 계기가 됐다.
서암 큰스님께 처음부터 동중 공부를 배웠기에 공양주하면서 이뭣꼬 화두 드는 것이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하지만 구참 스님들이 많이 계셔서 좌선시간이 적은 편이었다. 그래서 좀 해이해진다는 생각이 들어 초발심자들을 친절히 지도하신다는 송광사 구산 큰스님을 참예했다. 방부를 들여 달라 했는데 처음에는 구산 큰스님이 허락지 않았다. 하루 14시간의 가행정진을 하기에 너무 어리다 싶었던 것 같다. 그러나 나도 한 고집하기 때문에 굽히지 않고 매일 7일간 아침마다 예불 끝나면 구산 큰스님께 절하고 “생사대사 해결해야겠으니 방부 들여주십시오” 하고 청하고 나오곤 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7일째 되는 날, 스님이 허락하셨다. 단 하루 8시간 정진하면서 한 철 잘 살면 본방에 방부를 들여주겠다는 조건이었다. 그런데 반 철 남짓 지났을까 몸이 안 좋아 병원에 가니 폐결핵 늑막염 3기라 더 이상 정진이 불가능했다. 어린 나이에 육단심(肉袒心)으로 밀어부쳐 병이 난 것이다. 백양사에 내려가 치료를 받아야 했고 6개월 정도 지나니 괜찮아져 다시 선방으로 가려하니, 은사스님과 어머니를 비롯해 주변의 만류가 있었다. 학교만이라도 마치라는 것이었다.
이뭣꼬 화두를 들고 3년 동안 몸도 돌볼 겨를 없이 정진했다. 스스로 자신을 점검해보니 죽음의 공포는 많이 사라졌음을 알 수 있었다. 헐떡이는 마음도 심하지 않았다. 이렇게 수행해가면 화두도 타파하고 생사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생겼다. 수행이론과 실제를 좀 더 체계적으로 정리하기 위해 경전공부를 하고 싶었다. 이젠 좀 여유로운 마음으로 수행을 바르게 하기위한 불교학을 연찬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리하여 동국대, 인도 뿌나대, 영국 옥스퍼드대, 미국 하바드대 등 긴 학문의 역정이 시작됐다. 사실 동국대를 졸업하고 선방과 유학 사이에서 갈등하다 유학을 결심했다. 빨리어와 범어를 공부해 초기경전을 공부하고 싶어서였다. 먼저 스리랑카에서 2년, 인도의 뿌나대에 가서 3년간 원전 공부를 했다. 그러나 인도의 불교연구는 훈고학적인 면은 강하지만 비판정신이 부족해 체계적인 현대학문을 하는 데는 적합하지 않았다. 길을 찾다 옥스퍼드에서 유학 온 영국학생으로부터 옥스퍼드대에 좋은 교수님이 계시다는 소식을 접했고, 바로 영국행이 이루어졌다. 지도교수와 인연이 닿으려고 했는지 마침 경전읽기모임에 초청받아 한국에 오셨을 때 통역을 맡았다. 나름대로 영어공부도 하고 통역기법도 익히면서 준비를 많이 했기에 결과가 좋았다. 덕분에 지도교수의 인정을 받았고 옥스퍼드에서 공부하며 은혜를 많이 입었다. 옥스퍼드에서 6년 만에 ‘초기불교 찰나설의 기원과 발전’이라는 주제의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다시 하버드대에 세계종교연구소 선임연구원으로 가서 1년간 세계 여러 종교를 전공한 학자들과 교류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학문의 길에 들어섰지만 항상 수행에 대한 생각을 놓치지 않았다. 방학 때만 되면 고엔까 명상센터, 틱낫한 스님의 프럼빌리지 등에 가서 초기불교경전에 나오는 수행법을 배워 일상 속에서 실천해보았다. 경전의 말씀을 몸소 체험한다는 것은 환희심 넘치는 일이었다. 학문을 하는 동안에는 주로 초기불교 수행법에 관심을 가지고 여러 수행센터를 탐방해 선지식도 친견하고 자료수집도 했다.

유학생활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와 동국대에서 한 학기 강의하다 서옹 큰스님의 권유로 백양사 운문암 선방으로 가서 정진했다. 이제 실참실구(實參實求)해 생사문제를 해결해야지 불교학문만 해서는 죽을 때 아무 소용없다고 하시며 화두참선을 다시 하도록 경책하셨다. 그리고 큰스님께서 지금까지 한 참선 공부에 대해서 점검하셨다. 유학시절에는 주로 경전공부와 초기불교수행을 중점적으로 했고 간화선은 하지 않았다고 말씀드렸다. 소년시절에 했던 이뭣꼬 화두를 다시 주시며 참구하라고 했다. 어려서 화두 참선하던 것을 되살리고 이론적으로 공부한 것을 정리도 할 겸 하안거 동안 운문암에서 열심히 정진했다. 지금까지 수행정진을 바탕으로 해 이뭣꼬 화두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본다.

이뭣꼬 화두의 특징은 여타 격외어로서의 화두와 달리 나 자신의 실존에 관한 의문이다. 지금 여기서 보고, 듣고, 숨쉬는 구체적인 존재 현상에 관한 궁극적 물음이다. 늘 깨어있어 소소영영(昭昭靈靈)한 존재의 참모습이 무엇인가에 대한 간절한 의심이다. 본래면목으로서의 ‘나’, 아니 ‘나’라는 이름 붙이기 이전의 한 물건인 것이다. 혜능 스님은 “나에게 한 물건(一物)이 있다”라고 해 ‘나’ 혹은 ‘본래면목’이라는 언어가 가질 수 있는 실체론적 입장을 경계한다. 나아가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가?”하는 혜능 스님의 물음에 대해 “설사 한 물건이라 해도 맞지 않습니다”라는 희양 스님의 대답 속에는 더욱 철저한 중도적 언어표현을 통해 ‘나’ 혹은 ‘본래면목’을 객진번뇌 속에 있는 소소영영한 실체적 존재로 착각하게 하는 심리적 경향성을 척파한 것이다. 편의상 주인공, 한 물건, 참나, 자성청정심, 불성, 참사람 등등 여러 가지 언어를 통해 표현하고 있지만 온전히 그것을 드러낸 것은 아니다. 그러기에 여기서 간절한 의심이 일어난다.
도대체 보고, 듣고, 숨쉬는 존재가 여기 분명히 현존하고 있는데 “이것이 무엇인가?”라는 의심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 답을 찾아 뛰어든 것이다. 잡힐 것 같지만 잡히지 않는다. 답답하다. 답답한 마음 상태의 지속은 폭발 직전의 감정으로 굳어져 간다. 의정이 생긴 것이다. 문제는 더 이상 되뇌일 필요가 없다. 오로지 답을 찾는데 몰입한다. 어떠한 관념의 때도 묻지 않도록 단지 답만 찾는다. 이렇게 해 의심→의정→의단이 형성돼 행주좌와 어묵동정에 화두일념이 형성된다. 일념이 만년이 되도록하면 의단독로(疑團獨路)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 언어도단(言語道斷) 심행처멸(心行處滅)의 상태에서 전후 좌우 상하 모든 길이 끊어져 오고 가도 못하는 상태가 되는데 은산철벽에 갇히게 된 신세이다.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백척간두에서 진일보해 한번 크게 죽었다 살아난다. 온몸을 의단이라는 용광로 속에 던져 한 송이 연꽃으로 다시 피어나는 것이다.
<육조단경> 기연품의 “언제나 자성은 스스로 여여(如如)하다”는 말씀처럼 보고, 듣고, 숨쉬는 곳에서 밝게 빛나고 있는 것이다. 이제부터 이뭣꼬 화두는 이것을 드러내어 행주좌와 어묵동정에 쓰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자성자여(自性自如)의 존재모습을 그대로 삶 속에서 드러내어 연기-공-중도의 실천행을 지속시켜 가는 것이다. 날마다 마음 빛을 돌이키면(廻光返照) 있는 그대로(如實知見)란 실감 속에서 이뭣꼬 화두 자체가 드러나 공부가 순숙해진다. <임제록>의 말씀대로 “가는 곳마다 주인으로 지금 여기에 참다운 삶(隨處作主 立處皆眞)”을 살아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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