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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 원광사 주지 청안 스님...법보신문 09. 11.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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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관리자 작성일09-12-23 14:30 조회3,21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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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를 모르는 바다처럼 생각 버리고 오직 할 뿐

이렇게 많은 불자님들을 뵙게 돼서 반갑습니다. 이곳 시선원에 와보니 참으로 수행하기 좋은 곳이라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좋은 환경을 갖지 못한 곳들도 많이 있음을 불자님들께서는 잊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좋은 수행환경에서 정도를 따르는 사람으로서 불자들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여기 계신 모든 분들은 불교의 전통에 대해 잘 아시리라 생각됩니다. 선불교는 우리 인간의 생과 사, 모든 인생에 큰 가르침을 주는 높은 진리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람들에게 이 길을 따르라고 강요하여 말하지 않습니다. 단지 그 길을 모든 사람들에게 제공할 뿐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옳고 다른 사람은 그르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가야할 곳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따라서 가야할 정도의 길, 사성제는 정말 중요합니다. 제가 한국불교의 전통에 귀의한 이유는 불교에서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행동으로는 이 길을 가고 있으면서 말로는 다른 길을 이야기 한다면 그것은 어불성설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마음은 점점 더 조각조각 나눠지게 됩니다. 그로인해 우리는 일심을 갖기 어렵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가 수행을 하면 참본성인 일심이 자연스럽게 나타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와 우주 만물이 하나가 되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바로 우리가 가는 길, 정도라고 부릅니다.

이분법적 사고가 고통의 원인

이 길을 통해 우리는 왜 모든 사람들이 고통을 받는지를 환히 들여다 볼 수 있게 됩니다. 그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항상 상대적이고 이분법적인 사고에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생각이 우리 나름의 세계를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에 머물러있는 한 우리는 늘 이 세계를 선과 악의 두 가지로 나누게 됩니다. 따라서 이런 이분법적인 사고에 집착하는 사람은 자신과 남들을 고통 속에 빠뜨립니다. 그러므로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야만 일심을 얻을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이것을 가르쳐 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수행하고 있는 모습을 통해 다른 사람들이 이러한 길에 동참하도록 북돋워 줄 수는 있습니다. 우리가 한 마음으로 수행정진 한다면 결국엔 다른 사람에게도 피난처와 쉴 곳을 제공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 중에는 ‘언제까지 이 법이 지구상에 살아남을 수 있을까’하고 궁금해 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한다면 이 가르침이 얼마동안 유지될 수 있을까에 대한 물음이겠지요. 하지만 불교의 가르침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것이기 때문에 결코 시간으로 헤아릴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 법이 지구상에 얼마동안 계속될 것인가를 질문한다면 ‘고통이 지속되는 한’이 답이 될 것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어디에 고통이 있고 어디에 깨달음이 있는가를 말씀하셨습니다. 또 어디에 중생이 있으며 그 중생이 어떻게 하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지를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지구상에는 66억의 인구가 살고 있습니다. 굉장히 많은 수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정심을 유지한다면 인구의 수가 지금보다 두 배로 늘어나도 문제없습니다. 하지만 여러분들이 보시는 바와 마찬가지로 지구상 66억 인구 모두가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에 젖어 있습니다. 이것은 세상 그 자체가 고통이라는 말과도 같습니다.

또한 우리는 매우 잘못된 견해를 갖고 있습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우리의 업을 남의 잘못으로, 또는 남이 행한 것이라고 비난하는 일입니다. 사실 우리는 남을 비난하고 탓하기에 앞서 우리 자신을 돌아봐야 합니다.

정도는 우리가 스스로에게 바른 질문을 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여러분도 여러분 자신을 돌아보십시오. 여러분들의 마음을 돌아보십시오. 여러분은 여러분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어떤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 도대체 이것이 어디에서부터 왔는지를. 내가 나라고 부리는 것. 나의 자아라고 하는 것이 도대체 어디서 왔는지를. 우리가 인내심을 갖고 이러한 질문을 꾸준히 갖고 간다면 결국에는 어떤 해결점을 찾을 수 있습니다.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이런 질문을 놓치지 않고 간직하는 것이 바로 정도로 가는 길입니다.

가장 근원적인 것은 바로 ‘이것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이냐는 인식에서부터 모든 것이 시작합니다. 선불교에서는 이것을 화두라고 하지요. 하지만 화두의 근본을 이해하는 것도 매우 중요합니다. 사실 화두라는 것은 ‘아주 신비스러워서 다른 사람에게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화두라는 것은 자신의 질실한 마음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화두입니다.

마음 속 질문은 무엇이든 화두

2500년 전 부처님께서는 탐진치가 어디서부터 나오는지 바르고 명확하게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모든 고통의 원인을 무지, 무명에서 출발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지는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이것은 지식이나 생각이 모자란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의 의식을 가리고 있는 생각의 집착에서 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생각에 집착하지 않고 대상을 바라본다면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거울과 같이 비춰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의문을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의문이 여러분의 마음을 엽니다. 여러분이 바르게 보고 바르게 들을 수 있게 해줍니다. 여러분이 생각에 집착하는 것, 특히 불교적인 생각에 집착하는 것 자체도 여러분에게 방해가 될 수 있습니다. 처음에 말씀드렸듯이 이것이 바로 정도로 가서 일심을 얻기 위한 첫 걸음입니다. 바로 여러분이 처한 상황에서, 일생에서 얻어야 할 것이 이 일심입니다.

여러분 업을 걱정하지 마십시오. 업을 뛰어 넘어야 합니다. 나는 이생에서 여자의 몸을 받았으니 다음 생에서는 남자의 몸을 받아 꼭 스님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부처님께서는 모든 만물이 불성을 갖고 있다고 했습니다. 모든 중생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남자들은 수행할 시간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가족을 위해 열심히 일하고 바쁘게 생활하고 사회생활을 하는 것도 좋습니다. 그러나 하루에 딱 30분만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자신을 돌아보는데 써봅시다. 그렇게 되면 여러분은 일과 상관없는 어떤 것을 얻게 됩니다.

우리의 인생은 얼마든지 단순해질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만일 나무의 뿌리부터 나무가 자라는 것을 볼 수 있다면 나무의 성장 과정이 자명하게 보이겠지요. 하지만 여러분이 지금 나뭇잎에 매달려 있는 상태라면 여러분은 나무가 가진 진정한 모습을 볼 수 없습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이 세계가 갖고 있는 모양과 표상으로 이 세계를 이해하지 말고 뿌리, 근본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여러분은 그 근원이 마음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바로 ‘이 마음’이 무엇일까를 생각하는 것이 수행의 시작입니다. 그렇다고 큰 의문에 대한 대답을 구하기 위해 애쓰지도 마십시오. 단지 그 의문과 함께 있는 것입니다.

매일 30분만 자신을 돌아봐라

수행에 대해 너무 많은 생각을 갖지 마십시오. 오직 할 뿐입니다. 그리고 이 질문을 마음에 담는 것이 우리의 본분임을 알아야 합니다. 음식을 끓이기 위해서 불이 냄비를 데우고 물을 끓이는 동안 단지 화덕을 지켜보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이 우주에서, 지구에서 해야 할 본분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별다른 노력 없이도 스스로 정도의 길을 갈 수 있게 됩니다. 또한 다른 사람들이 쉴 수 있는 공간도 만들어 주게 됩니다. 다른 사람이 당신에게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여러분은 스스로도 그 이유를 모른 채 그 길을 가고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해는 자신이 비추고 있는 줄 모릅니다. 바다는 파도가 치고 있는지 모릅니다. 들판의 벼는 스스로가 자라고 있음을 모릅니다. 그래서 옛 선사들은 ‘나가서 나무에게 물어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연은 스스로가 말을 할 수는 없지만 그 작용으로 우리에게 큰 가르침을 줍니다. 우리의 수행도 이와 같이 돼야 합니다. 벼가 자라는 것, 파도가 이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우리의 수행은 진행돼야 합니다. 바로 이것을 깨닫는다면 여러분은 불법승을 이해한 것이고 우리가 실천해야 할 것, 그리고 그것들의 작용을 이해한 것입니다. 법문은 이것으로 충분합니다. 오늘 법문을 다 잊더라도 여러분의 마음속에 각자 지니고 있는 의문은 절대 잊어버리지 마십시오.
 
정리=남수연 기자 namsy@beopbo.com

11월 7일 부산 해운대 신시가지에 위치한 시선원(지도법사 조원경) 개원 기념법회 법문을 요약 게재한 것입니다.

청안 스님 은

헝가리에서 태어나 20대 초반인 1991년 숭산 스님을 만났다. 1993년 미국으로 건너가 프로비던스 선원의 겨울 결제에 참가, 큰 가르침을 얻어 이듬해 28세의 나이로 출가했다. 이후 한국의 화계사, 해인사에서 수행했으며, 계룡산 신원사에서 숭산 스님의 지도 아래 세 번의 동안거에 들었다.

1999년 지도법사 인가를 받고, 2000년 고국으로 돌아가 헝가리 관음선원 주지를 맡았으며, 부다페스트에 선원을 세워 대중을 지도하며 수행했다. 이후 유럽 각국에 불교와 선수행법을 알리고 있다. 현재 헝가리에 유럽 최초의 한국식 사찰 ‘원광사’를 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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