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법스님 인드라망 생명공동체 상임대표(불교신문 11/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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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관리자 작성일11-04-01 20:02 조회2,240회 댓글0건페이지주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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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지내시는 게 괜찮습니까. 가까운 이웃나라에서 큰 재앙이 벌어져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기도 하고, 살아 있는 사람들은 삶의 터전을 잃었습니다. 또 살아 있다 하더라도 오늘과 미래가 매우 불안하고, 위험한 상황입니다. 하루하루가 생지옥의 삶입니다. 그들이 바로 우리의 친구이고, 우리의 가족이고, 우리의 이웃들입니다. 내 친구를 위해서, 내 가족을 위해서, 내 이웃들을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뭘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과연 어떤 것일까 생각해보면 스스로 무력함을 뼈저리게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슬프고, 답답한 심정입니다. 그러나 다시 또 차분하게 살펴보면 할 수 있는 일이 왜 또 없겠습니까. 무수히 많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제게 주어진 주제가 종단에서 하고 있는 5대 결사 중 하나인 평화결사입니다. 아마 평화결사가 실질적으로, 제대로 추진돼지고 실현돼지도록 하려면 내 친구요, 내 가족이요, 내 이웃인 그들을 위해서 지금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물음을 절실하고 간절하게 스스로에게 묻고, 나름대로 해답을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본인이 할 수 있는 일을 최선을 다해 하고, 그렇게 마음 쓰고 행동하고 노력하는 것이 나의 삶을, 또는 우리들의 삶을 평화롭게 하는 출발이고 전부입니다. 평화롭기를 희망하십니까. 왜 평화로워야할까요? 평화로워야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불교는 평화의 종교입니다. 평화라는 말을 이렇게 저렇게 표현합니다. 출가열반재일 즈음해 우리가 이런 자리를 갖고 있는데, 부처님이 왜 출가했을까요. 평화로운 삶을 살고 싶어서,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고 싶어서 출가하신 겁니다. 왜 평화로운 삶을 살고 싶을까. 왜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고 싶었을까. 간단합니다. 행복한 세상을 살고, 만들고 싶어 출가를 한 겁니다. 그리고 출가수행을 통해 실제 평화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됐고, 사람들에게 평화로운 삶을 살 수 있는 길을 가르치고 그런 노력을 통해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고자 일생을 바쳤던 게 부처님의 한 생입니다. 그러면 출가수행을 통해 찾아낸 평화는 불교적으로 무엇이라고 표현합니까. 바로 열반입니다. 열반의 내용이 우리말로 표현하면 ‘지고지순의 평화’ 또는 ‘지고지순의 행복’을 뜻하는 말입니다. 인간이 추구하고 실현할 수 있는 최고의 평화, 행복을 불교에서는 열반이라고 얘기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를 평화의 종교라 해도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평화를 추구해야 하는지, 평화를 이루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얘기해볼까 합니다. 평화를 왜 추구해야하는지 제대로 알려면, 평화의 반대를 생각해보면 됩니다. 평화의 반대는 싸움과 전쟁입니다. 싸움과 전쟁이 얼마나 나쁜 것인지, 이게 얼마나 인간을 비참하게 만드는지, 고통스럽게 하고 불행하게 만드는지를 제대로 인식해야 평화가 얼마나 좋은지 분명해집니다. 근데 사람들은 늘 평화를 희망하고 평화를 얘기하면서도 싸움과 전쟁이 얼마나 나쁜 것인지 잘 모릅니다. 이것을 잘 모르니 평화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가치 있는지에 대해서도 잘 모릅니다. <화엄경>에보면 ‘일기진심수사심’ 구절이 있습니다. 싸움과 전쟁의 원인은 미움과 화입니다. 그래서 미움과 화가 얼마나 나쁘고 우리의 삶을 병들고 고통스럽게 하고 불행하게 만드는지 설명하는 내용입니다. ‘한번 크게 미운 마음을 일으키고 화내는 마음을 일으키면 뱀의 몸을 받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미워하고 화내는 마음이 모든 공덕을 파괴합니다. 참선한 공덕, 염불한 공덕, 보시한 공덕, 기도한 공덕, 절을 한 공덕 다 파괴하는 것이 미움과 분노라는 얘기입니다. 결국 미움과 화에 의해 싸움과 전쟁이 벌어집니다. 진심, 모든 공덕을 파괴하는 독한 물건입니다. 인생을 추하게 만들고 인생을 초라하게 만들고 품위 없이 만드는 게 진심이라는 겁니다. 모든 공덕을 파괴하는 대표적인 독한 기운이 미움과 분노입니다. 사람들을 봐보십시오. 미움과 분노가 꽉 찬 얼굴을 보면 어떤가요. 보기 좋던가요? 다 나타납니다. 미운 마음, 화내는 마음이 꽉 차게 되면 그 사람 눈빛, 얼굴표정에 다 나타납니다. 당연히 생각으로도 나타나고 말로도 나타나고,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우리가 진심, 미움과 분노의 마음이 얼마나 나쁜지 잘 모르니까 쉽게 사람을 미워하고 화를 냅니다. 부모와 자식 사이에, 아내와 남편 사이에, 형제사이에, 가족 사이에, 이웃사이에 쉽게 화를 냅니다. 그래서 우리가 평화를 희망하고 평화의 삶을 이루고 싶으면 싸움과 전쟁의 절대적 조건, 모든 우리 공덕을 다 파괴해버리는 독한 분노가 얼마나 나쁘고 위험한 것인지 사무치게 알아야 합니다. 이걸 알게 되면 우리가 독한 물건을 버리기 위해 노력하게 됩니다. 하지만 막상 버리기가 쉽지 않지요. 고약한 물건인데 잘 버려지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죽을힘을 다해서, 무슨 이유로든지 미워하지 않겠다, 화 내지 않겠다고 노력하면 버려지지 않겠습니까. 미움과 화가 천하의 나쁜 물건, 독한 물건이고, 내 인생을 쓸모없이 만든다고 사무치게 인식하고 죽을힘을 다해 버려야겠다고 작심하게 되면 삶의 태도가 달라진다. 이런 결심을 하는 것을 우리는 소위 발심이라 하고, 결심하는 것을 원을 세운다고 합니다. 그리고 노력하는 것을 수행이라 하고, 용맹정진이라고도 하고, 참된 기도라고도 합니다.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는 게 불교의 인과법칙입니다. 그런데 평화라는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무슨 씨앗을 심어야합니까? 평화라는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게 하려면 어떤 씨앗을 갖춰야 할까요? 평화의 씨앗을 심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평화 열매는 맺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맨날 평화 타령을 하면서 심고 가꾸는 씨앗은 미움의 씨앗, 분노의 씨앗, 다툼의 씨앗, 싸움이 씨앗, 전쟁의 씨앗입니다. 그러면서 평화의 열매가 맺길 바랍니다. 그건 천지개벽이 되도 안될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엉터리 짓을 계속 하고 있습니다. 평화의 씨앗을 심지 않는 한 절대로 평화의 씨앗은 트지 않습니다. 평화의 꽃도, 평화의 열매도 나올 수 없다는 게 만고의 진리입니다. 사과의 결실을 걷고 싶은데 고구마 씨앗을 심고 가꾸면 사과를 얻을 수 없습니다. 사과라는 열매를 거두고 싶으면 반드시 사과 씨를 심어야 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평화의 결실을 얻고 싶다면 반드시 평화의 씨앗을 심어야 합니다. 어떻게 심어야 할까요? 죽을힘을 다해서 심고 가꿔야 합니다. 그게 기도입니다. 그게 수행입니다. 수행이 따로 있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지극정성으로 기도한다고 해도 여러분의 삶이 평화롭지 않다면, 그 기도를 해서 무엇 하겠습니까? 참선, 염불, 경전공부해서 무엇을 하겠습니까. 부모자식간이 평화롭지 않다면, 이웃 간이 평화롭지 않다면 그래도 우리 기도해야 할까요? 염불해야 하겠습니까? 다 부질없는 짓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왜 기도하고 염불합니까? 목적이 무엇입니까? 평화로워지기 위해서, 행복해지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어떻습니까? 기도해서 평화롭습니까? 왜 우리가 참선하고 기도도 하고 경전공부도 하는데 왜 평화의 꽃이 피어나지 않는 것일까요? 평화의 씨앗을 심고 가꾸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평화를 꽃피우고 싶은데 미움, 분노의 씨앗을 심고, 오만, 시기질투, 이기심, 탐욕의 씨앗을 심기 때문입니다. 그런 씨앗을 심고 아무리 기도를 하고 절을 한들, 어떻게 평화의 열매가 맺겠습니까. 부처님은 어떻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부처님은 “나의 가르침은 지금 여기서 누구나 다 이해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적어도 같은 자리에 있고 말을 알아듣는 사람은 누구나 가르침을 이해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법문 들어보면 어떻습니까? 잘 이해가 되시던가요? 어렵든가요? 두 번째로는 “나의 가르침은 바로 이뤄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먼 훗날도 아니고 또 다른 장소도 아니고 바로 그 자리에서 실현된다고 하셨습니다. 기도하면 바로 영험이 나타난다는 뜻입니다. 기도하면 영험이 나타나나요? 그렇지 않다면 기도를 왜 합니까. 불러도 불러도 대답이 없는 부처님을 왜 자꾸 부릅니까. 세 번째는 “내 얘기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증명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예를 들면 어떤 것일까요? 우리가 배가 고프면 무엇을 합니까? 밥을 먹습니다. 밥 먹으면 배고픔이 해결되죠. 이해되지 않는 분 계십니까? 아무도 안 계시네요. 부처님 가르침이 이런 것입니다. 이렇게 되지 않는다면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이 아닌 것을 다루던가, 잘못 알고 잘못 가르치던가 둘 중 하나입니다. 배고파서 밥을 먹었는데 어떻습니까? 10년 뒤에 배고픔이 해결되나요? 바로 해결되죠. 여기서 밥을 먹는데 지리산에서 해결되지 않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이런 것입니다. 기도를 하면 즉각 효엄이 나타나고 영험이 나타납니다. 이런게 불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렇게 단순명쾌하고 매우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불교를 잘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가장 큰 문제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불교는 뭔가 어려운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보통 사람은 이해할 수 없는 특별한 공을 들여야만 이해할 수 있는 게 불교란 생각을 우리는 하고 있습니다. 이런 선입견, 편견이 불교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부처님은 평화의 삶을 실현하기 위해서, 평화의 세상을 가꿔내기 위해서 어떻게 하라고 했습니까? 우리는 싸우는 데는 죽을힘을 다하는데, 안 싸우기 위해 죽을힘을 다하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난 죽어도 안 싸울거야. 왜 싸움이라는 건 몹쓸 물건이니까.” 이런 생각을 해야 하는데, 실제로 보면 싸우는 데에는 힘을 다하지만 안 싸우기 위해 애쓰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기도를 하지 않는 것입니다. “죽을힘을 다해 싸우지 않겠다.” 이게 기도이고 수행이고 염불입니다. 이게 바로 싸우지 않는 씨앗입니다. 평화의 열매를 맺는 방법입니다. 우리가 기도해서, 수행해서 얻고 싶은 것은 평화이고 행복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엉뚱한데서 힘을 쓰고 있습니다. 부처님은 우리가 평화로운 삶을 이루려면 어떻게 할 것인가 했을 때 두 마디로 요약했습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삼계개고 아당안지.” 이게 평화의 씨앗이고 평화의 메시지입니다. 부처님 살림살이를 한 마디로 요약하는 말입니다. 팔만대장경도 이 내용 갖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부처님 일생 살림살이를 똘똘뭉쳐 한 마디로 표현하면 “천상천하 유아독존 삼계개고 아당안지”입니다. 팔만대장경도 마찬가지입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은 무슨 뜻일까요. 여기에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함께 묶어 생각해봐야 합니다. 나는 누구인지, 인생이란 무엇인지. 이 질문을 하지 않으면 일생을 헛살게 돼 있습니다. 무엇을 해도 다 틀리게 돼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옷을 입을 때 첫 단추를 잘못 꽤는 것과 같습니다. 첫 단추를 잘못 꾀면 다음 단추가 다 틀려버리죠. 인생살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첫 단추가 “나는 누구인가, 인생이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입니다. 이 물음을 진지하게 묻고 또 물어야 합니다. 일생을 물어도 괜찮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 물음을 안 묻습니다. 이게 인생 제1의 화두입니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 하는 질문에 부처님은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고 답하셨습니다. 이 말은 세상에 그보다 더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가장 거룩하고, 위대하고 가치 있는 존재이며, 완성된 존재이고 신비하고 불가사의한 존재라는 말입니다. 즉 최고란 뜻입니다. 누가 그렇다는 뜻입니까? 바로 각자가 “천상천하 유아독존”입니다. 본인이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고 한다면 어떻습니까. “내가 얼굴이 안 예뻐서 안될 것 같다” “내가 학교를 제대로 졸업하지 않았다”며 기죽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건 이 말을 믿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란 사실에 대해 분명하게 인식하고 확신하게 되면 세상에 부러울 게 없습니다. 부족할게 없습니다. 부처님한테 빌 이유도 없습니다. 본인이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계속 뭔가를 구걸하고 다닙니다. 이런 바보 같은 짓을 우리는 하고 다닙니다. 여러분 돈 좋아하십니까? 자본주의 시대에 돈이 최고라고 합니다. 제가 돈이 많습니다. 필요한 분 있으면 충분히 드릴 수 있습니다. 얼마 쯤 있으면 되겠습니까? 많이요? 많으면 한 1조? 10조? 너무 많나요? 어쨌든 자본주의 사회니까 돈이 최고라 합니다. 누가 돈을 10조 가지고 와서 여러분께 10조 드릴테니 목숨을 달라고 하면 주시겠습니까? 10조 보다 더 귀한게 여러분 생명입니다. 10조 줄테니 아들, 딸의 눈을 달라고 하면 주겠습니까? 서울대 졸업장과 내 목숨을 바꿀 수 있습니까? 아파트 1000평 짜리 줄테니 목숨 내달라면 주시겠습니까?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란 말이 맞지 않습니까? 이 사실을 부처님 말씀대로 인정하는 것이 평화를 실현하는 첫 출발입니다. 이 사실을 믿지 않는 한, 분명한 자각과 확신을 하지 않는 한 절대 평화는 이뤄질 수 없습니다. 이것이 평화의 씨앗을 심는 일입니다. 이 사실에 대한 자각과 확신 없이 기도하고 참선하는 것은 백날 헛수고에 불과합니다. 이 명명백백한 사실에 대해 왜 믿지 않습니까?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부처님은 “삼계개고 아당안지”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에 나와 함께 존재하는 뭇생명들이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들이 고통으로부터 해탈하기 위해 내 인생 모두를 바치겠다고 하셨습니다. 고통에 시달리는 뭇생명을 위해 내 인생 모두를 바쳐 해탈의 길로 인도하겠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한 마디로 ‘대자대비’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모든 생명들을 고통으로부터 해탈시키기 위한 일체를 대자비행이라고 합니다. 이게 평화를 이루는 길입니다. 왜 그래야 합니까. 나만 천상천하 유아독존인가요? 만나는 사람 모두 유아독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만나는 내 아내가 세상에서 가장 거룩하고 귀한 존재며 고마운 존재라고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을 이해하고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 진정으로 고마워하는 것이 평화의 씨앗입니다. 내가 만나고 있는 상대를 천상천하 유아독존으로 이해하고 보호하고 존중하고 배려하고 고마워하는 것이 평화의 씨앗인 것입니다. 이해의 씨앗, 인정의 씨앗, 존중의 씨앗, 배려의 씨앗, 보호의 씨앗, 감사의 씨앗 이게 평화의 씨앗입니다. 이것을 보다 더 풍부하게 보다 더 확고하게 가꾸고 가꿔내는 것이 평화의 씨앗을 심고 가꾸는 것입니다. 자, 남편이 아내를 천상천하 유아독존으로 이해하고 존중하고 배려하고 고마워한다면 아내가 좋아겠지요? 퇴근하고 돌아오면 기분 좋게 맞아주겠지요? 그러면 사이가 좋아지고 평화로워질 것입니다. 반대로 아내가 남편을 천상천하 유아독존으로 이해하고 존중하고 배려하고 고마워한다면,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평화는 저절로 옵니다. 거부하려야 거부할 수 없습니다. 반드시 오게 돼 있습니다. 이렇게 알고 마음 쓰고 말하고 행동하고 생활하는 것이 진정한 기도이고 참선이고, 염불이고, 절이고, 불공입니다. 그렇게 하면 즉각적으로 아내의 얼굴도 환해지고, 남편의 얼굴도 환해집니다. 서로서로 화목해지고 평화로워집니다. 부모와 자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웃과 이웃사이, 친구사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삼계개고 아당안지”를 내 사고가 되게 하고 행동이 되게 하고, 우리 식구들이 삶이 되게 하고, 직장동료들의 삶이 되게 하는 것을 우리는 보살행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을 지금 조계종단이 하는 일로 연결시키면 평화결사를 실천하는 일입니다. 불교는 평화의 종교입니다. 적어도 평화의 문제를 다루는 일에 있어서는 불교인들이 일류여야 합니다. 평화로운 삶을 살고 행동하고 활동하며, 평화에 대해 모범을 보여주며 평화의 교사가 되기도 하고, 평화의 봉사자가 돼야만 비로소 기도를 잘한다, 염불을 잘한다, 참선을 잘한다, 절을 잘한다, 경전공부를 잘한다, 그래서 부처님의 제자일 수 있습니다. 그 부분을 잘 못한다면 불교를, 부처님을 욕되게 하는 일입니다. 그 결과는 불교의 쇠퇴이며 몰락을 가져올 것입니다. 한국불교를 위해서, 한국사회의 미래를 위해서 우리는 반드시 부처님 제자답게 평화의 모범을 보이고, 평화의 교사노릇을 헌신적으로 해야 됩니다. 세상이 어려울 때일수록, 세상이 위험할 때일수록 평화의 실천자로 평화의 종교를 신행하는 불자로서 제 길을 제대로 가고, 제 역할을 충실하게 잘 할 수 있도록 함께 마음을 모으고 용맹정진합시다. 고맙습니다. 정리=어현경 기자 사진 신재호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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