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스님 없나요? 영화사 동진스님 글 ...달라스여래사 카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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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관리자 작성일10-02-03 16:14 조회3,507회 댓글0건페이지주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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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 온 지 3년이 지났다. 이 기간 동안에도 텍사스, 피닉스, 메릴랜드, 포틀랜드, 리노 등에 계셨던 스님들이 떠났다. 많은 스님들이 한국에서 왔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떠나는 곳이 미국이다. 나도 미국에 오기 전부터 이곳 살이가 쉽지 않다는 말을 분명히 들었다. 그러나 말만 들어서는 실감이 나지 않는, 그런 미묘한 어려움이 미국의 한국 불교계에는 엄존한다.
스님이 떠날 수밖에 없는 가장 큰 이유는 한국 스님과 미국 불자 간에 존재하는 지대한 간극 때문이다. 그 간극은 스님과 신도들이 서로를 잘못 알고 있는 데서 비롯된다. 한국에서 온 스님은 미국에 사는 신도를 ‘한국 불자’라는 생각으로 신도들을 대하고, 미국 신도들은 한국 스님을 ‘자신들이 생각하는 스님’으로 대하는 데서 오는 간극이다. 이것이야말로 굉장히 현실적이면서도 지독히도 심각한 문제점이다. 이 간극은 어쩌면 긴 시간이 해결해 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종단에서 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아무리 큰스님이라 해도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우선 미국의 절은 한국의 절처럼 그런 모습과 시스템을 가지고 있지 않다. 미국의 한국불교 역사를 대략 50여 년으로 보는데, 초창기에 열린 역사가 긴 몇 개의 큰 절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절은 몇몇 뜻 맞는 신도들이 인연 있는 스님을 모시고 와 꾸민 것이다. 창건주가 셋도, 넷도 되고 심지어 신도 전체가 될 수도 있다. 이것이 나중에 문제가 된다. 그들이 살다 뜻이 안 맞으면(강력한 구심점이 없으면 대중의 뜻이 하나로 맞는 건 불가능하다) 헤어지게 되고, 떠난 사람들은 또 절을 새로 낸다. 그 절이라는 것이 일반 주택 하나를 빌려 부처님을 모시는 것이다. 그리고 다달이 집세를 내야 하는 ‘렌트 하우스’이다. 집세가 만만치 않다. 그 집세를 책임지고 잘 꾸려나가야 하는 것이 스님의 몫이다.
한국 스님들은 대체적으로 돈 얘기는 죽어도 못한다. 그렇다고 신도들이 알아서 하느냐, 절대 아니다. 그 와중에 스님과 신도 간에 골이 생기고, 스님이 떠나고 새 스님이 오시고, 그렇게 절이 없어지고 다시 생긴다. 신도들은 절이 있으면 좋지만, 그 절을 책임져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스님도 그들이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하지 못한다. ‘한국 스님’이기 때문이다. 집세를 안 내면 좋겠다 싶어, 스님이 어찌어찌 절을 사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다달이 들어가는 융자금을 마련하지 못해서 결국 손 털고 물러난다. 이것은 하나의 패턴이다.
이번에는 스님과 신도의 관계를 살펴보자. 이름하여 창건주들은 스님은 월급 받고 포교라는 일을 하는 전문직쯤으로 이해하고 있다. 어디서 비롯된 건지 와서 보니 그렇다. 스님은 물론 이런 사실을 추호도 모르고 온다. 그들은 미국에도 한국과 같은 ‘절과 신도’가 있을 것이고, 자신은 그저 ‘중노릇’만 열심히 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온다. 그러나 이들은 스님을 모른다. 승복 입고 머리 깎은 사람이 스님인 것은 알지만, 그들이 어떻게 사는지는 전혀 모른다. 예를 들면 ‘마늘은 안 드세요? 왜요?’ 하며 기절할 듯이 놀란다. 스님에 대한 지식은 전혀 없으면서도 스님에 대한 잣대는 있다. 일단은 영어를 잘 할 수 있어야 한다. 운전도 할 수 있어야 하고, 차도 사고 혼자 살아갈 돈도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왕이면 특기도 있고, 도력도 높으면 좋고, 말주변도 좋아야 하고, 아프지도 말아야 하고, 이슬만 먹고도 살아야 한다. 그것이 그들이 원하는 스님상이다.
이렇게 스님한테 바라는 것은 많으면서 어떻게 대우해야 하고, 절에서는 어떻게 행동해야 한다는 지극히 기본적인 법도를 배운 적이 없다. 그걸 미처 파악하지 못한 스님은 자신 앞에 있는 신도들이 괘씸하다고 여긴다. 아무 것도 모르는 불자는 야단치는 스님은 성격이 좀 안 좋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가공할 간극들은 밥 먹는 데서부터 화장실 가는 일에 이르기까지 처처에서 발견되고 발생한다.
미국에 온 스님들은 마치 황야의 무법자처럼 어디서 무엇이 닥칠지 모르는 상태에서 홀로 삶을 시작한다. 사방에 숨어 있는 위험을 상대하면서 저 들판을 걸어가는 것이다. 어디다 말 붙일 사람도 말을 알아듣는 사람도 없어, 지쳐서 쓰러질 지경이 되면, 스님들은 엎드려 생각한다. ‘내가 여기서 도대체 왜 이러고 있지?’
과연 백년 뒤에도 미국에 한국불교가 있을까? 좀 더 나아진 모습으로 있을까? 불자 수는 늘어날까? 잘은 모르겠다. 그러나 새크라멘토 영화사 신도들은 지난 3년간 이 중한테 두들겨 맞고 꾸중을 들으면서 이제 겨우 불자가 되었다. 불자가 되어 정말 행복해졌다고 한다. 모두가 힘을 합쳐 이 중을 죽어라 붙들기 때문에, 나는 그들을 위하여 진심으로 눈물을 흘리며 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나의 경험으로 확신컨대, 미국의 한인 신도님들은 스님들이 제대로만 가르친다면 굉장히 아름다운 불자로 변신한다. 포교에 사명감을 가지고 불교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자 하는 스님이 필요하다. 저 영화 ‘미션’에 나오는 선교사처럼 불모의 땅에 처음 한국불교를 알리러 온다는 생각으로, 그렇게 땅바닥에 엎어질 각오가 되어 있는 스님이 지금 미국에는 절실하다. 승랍이나 법랍을 초월하여 모든 것을 걸고 포교할, 그런 각오를 가진 스님 말이다.
영화사 동진스님
http://cafe.daum.net/texasdall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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