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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밤과 낮(이원익/재불련 이사 )...LA중앙일보 08. 11.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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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관리자 작성일08-11-20 11:26 조회2,44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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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에 우리 어머니가 무슨 얘기 끝에 남편은 잃었지만 자식이 있는 사람과 남편은 있으나 자식이 없는 사람 중에 누가 그래도 더 나을까를 얘기하신 적이 있다. 말인즉슨, 여인이 갑자기 남편을 잃으면 캄캄한 밤중에 하늘이 무너진 듯 어둠과 절망 속에 내던져질 것이지만 어린 자식이 남아 있다면 그래도 괜찮다.

   혼자서 이를 살려서 키우기가 몹시 괴롭겠지만 살이 터지고 뼈가 닳더라도 어쨌든 키워 놓으면 아주 조금씩 동녘 하늘이 트이듯 나이 들어 늙어 가면서는 차차 인생이 밝아 온다는 것이다.

   반면에 남편은 멀쩡하게 살아 있되 자식이 없는 사람은 지금 당장은 편하고 환한 대낮이겠지만 해가 기울어 오후가 되고 저녁이 되고 밤이 찾아오듯 인생은 마침내 점점 더 캄캄해지는 한밤의 어둠 속에서 끝나 버린다는 것이다.

   유교적인 가족주의가 깊이 배어 있는 얘기로서 요즘 세상에 어디서나 꼭 들어맞는 얘기라고 할 수는 없을지 몰라도 우리가 만약 이 얘기에서 '자식'이란 말을 '꿈'이나 '희망'이란 말로 바꾸어 놓고 음미해 보자면 요즘 세상에도 널리 보편성이 있는 얘기가 될 것이다. 꿈과 희망이 없는 인생이란 결국 캄캄한 밤 어둠 속에서 끝나고 말 테니까.

   그 보편성이란 불교 특히 미주의 한국 불교를 얘기할 때도 무리 없이 적용될 것이다.

   우선 미주한국불교가 어린이 청소년을 기르지 않고 어른이나 노년층 위주의 불교로 갈 때 지금 당장은 그게 편하고 실속이 있을지라도 해가 갈수록 차차 어둠이 찾아와 마침내 캄캄한 밤중 막다른 골목의 수렁에 빠져 불교는 사망신고를 할 것이다.

   반면에 어린이와 청소년에게 우선순위를 주는 불교를 한다면 처음에는 성과도 빨리 오르지 않고 귀찮은 일만 많을 것이며 돈 쓸 곳은 많아 늘 전전긍긍하게 될 것이다. 게다가 법당은 소란스럽고 어지러워서 일일이 챙겨 주려니 골머리가 아플 것이다.

   하지만 어쨌든 이렇게 한 해, 두 해, 다섯 해, 열 해를 내 자식 키우듯 뒷바라지 하며 버티고 나면 그 아이들 중에 자라서 집 찾아 들여다보는 기특하고 듬직한 이들이 틀림없이 있을 것이고 절 살림도 날이 새듯 조금씩 펴질 것이다.

   어느 날 장성한 형제자매들이 왁자지껄 모여들어 낡은 오막살이를 허물고 떠오르는 아침 햇살 속에서 튼튼한 새 주춧돌을 놓는 것이 정해진 순서다.

   둘째의 갈림길은 불교를 언제까지나 켸켸묵은 한문 위주로 하고 신도들에게는 내용도 잘 안 가르쳐 주면서 눈치로만 깨치게 하느냐, 아니면 쉬운 요샛말로 된 한글 경전을 가지고 제대로 부처님 말씀을 가르쳐 가면서 하느냐다.

   입에 익고 귀에 익고 가락도 구성진 한문 염불만 읊고 앉았으면 누가 보기에도 그럴 듯하고 일일이 답해 줄 일도 머리 쓸 일도 적어 우선은 좋을 것이다. 제 멋에 겨워 날 저무는 줄도 모르고선.

   대신 불경을 요샛말로 바꾸어 하자면 경망스럽고 박자도 잘 안 맞는데다가 일일이 찾아보고 확인해 볼 일도 많아 성가실 것이다. 하지만 꾸준히 그리 하다 보면 가슴이 어느새 부처님의 말씀으로 환하게 밝아질 것이고 어색했던 가락에도 어느덧 흥겨운 곡조가 붙을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기복 불교 제식 불교 위주로 곧장 가느냐, 포교에 온 힘을 쏟느냐가 밤과 낮의 골짜기, 사망의 골짜기냐 생존과 번영의 골짜기냐의 갈림길이다.

   때맞추어 재 지내고 등 달고 온갖 제사 지내기만 되풀이하다 보면 우선은 질긴 목숨을 이어가겠지만 이는 결국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맞을 나 자신의 쓸쓸한 임종을 위한 예행연습이 될 뿐이다.
 
[LA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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