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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산스님--서산 부석사 주지 주경(현대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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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리틀붓다 작성일09-04-11 20:21 조회2,25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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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 속에 특출한 멋 스며

권위보다 매사 대화와 논리로


미산스님은 평범해 보인다. 성격도 그렇고 모습도 정말 평범하다. 하지만 그 평범한 속에 특출한 멋이 배어있다. 마치 질리지 않는 뚝배기나 된장찌개처럼 천연스러운 맛이 느껴지는 것이다.
대학 1년 선배였던 스님은 불교학생회 지도법사로 나와 첫 인연을 맺었다. 당시 동국대 불교학생회는 석림회 2학년 스님 두 분씩 소임을 맡아 매주 법회를 지도해주셨다. 굉장히 활동적이며 적극적 성격의 선종스님과 조용하고 차분한 미산스님 두 분은 2학년이 되면서 스님들의 추천과 자원으로 지도법사 소임을 맡았다. 두 스님들은 매주 정기법회 외에도 바쁜 공부 시간을 할애해서 수시로 불교학생회 동아리방에 들르며 학생들과 함께 하는 시간을 가지곤 했다. 초파일준비 때는 연등 만드는 일에도 적극 나서 하루종일 연잎을 비비고 간식도 함께 하며 일상가운데 학생들을 이해하고 돕고자 하셨다.
활달한 선종스님의 그늘에 가려 거의 눈에 띄지 않던 미산스님이 분명하게 각인된 것은 여름수련회에서였다. 수련회 프로그램에서 참선지도를 맡은 미산스님은 참선에 대해 분명하고 자신있는 태도로 알기쉽게 설명해주었고, 자세 하나하나 빠짐없이 직접 시범을 보이며 세세하게 챙겨주니 수련생 모두는 깊은 감명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출가 수행자의 진면목은 판도방(判道房)에서 나타난다고 하였는데, 미산스님은 그 자리를 통해 일상적인 ‘지도법사스님’에서 진정한 스승으로서 ‘스님’의 모습을 보이셨던 것이다. 좌선하고 앉은 모습 자체만으로도 학생들의 신심이 우러나고, 잠시라도 함께 수행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기뻐할 수 있었다. 그동안 열심히 불교를 믿고 배워왔지만 수행의 깊이와 가치를 그렇게 절실하게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열 여섯 나이에 선방에 첫 철을 살았던 미산스님의 수행력이 바탕이 되어 주었다. 참선을 마치고 잠시 몸풀이 요가를 할 때 두 다리가 쭉 펴지며 책에서만 보았던 어려운 자세들이 스님의 몸을 통해 보여질 때 수련생들은 또 한번 놀라움에 빠질 수 밖에 없었다. 당신이 공부하면서 건강을 위해 조금씩 한 것이라며 학생들도 꾸준히 하게되면 공부에도 도움이 되고, 금방 당신처럼 할 수 있을 거라는 말에 학생회원들은 한동안 요가열기에 휩싸이기도 했다.
단정한 두루막차림에 늘 쪼래기를 어깨에 걸고 차분차분 걸으며 급한 일이 하나도 없어보이던 모습은 마치 사리불과 목건련존자를 부처님의 제자로 인도한 마승비구처럼 선뜻 눈에 띄지 않으면서도 기억에 남는 모습이다. 담담한 미소에 낮은 목소리로 대화를 이끌어 가곤 하던 스님은 수련회이후로 학생들의 상담자 역할도 맡게 되셨다. 어떤 이야기든 다 들어주시고 상대방을 끝까지 배려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나가곤 했다.
간혹 학생들이, 동아리방에 붙어있던 법당에서 여법하지 못한 모습을 보이는 일이 있기도 했는데, 스님은 그럴때도 큰소리로 꾸짖거나 크게 나무라지 않으셨다. 잠시 굳은 얼굴을 보이다가도 금새 풀고는 차분히 대화의 자리를 마련하여 조목조목 설명하고 이해를 구하곤 하셨다. 승려의 권위나 위엄보다는 학생들이 감정적으로나 이성적으로 도저히 거부하거나 거역할 수 없는 자세와 논리로 매사를 풀어가곤 하신 것이다.
이렇게 학생들에게 ‘여법함’ 그 자체로 인정되던 미산스님의 새로운 면모를 볼 수 있는 날이 있었다. 특별법회를 끝낸 뒤 다과와 더불어 노래를 부르며 친목을 도모하는 모임에 미산스님은 지도법사로 자리를 함께 하시게 되었는데, 사회자가 법사스님들께 마이크를 돌린 것이다. 대다수의 학생들은 스님의 노래를 전혀 기대도 않고 다만 짤막한 인사말정도일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미산스님은 당시 유행하던 이선희의 ‘J에게’를 부르시는 것이었다. 변함없는 단정한 자세로 거침없이 부르는 열창과 시원하게 터져 나오는 목소리는 한순간에 분위기를 열광시키고 말았다. 기립박수를 치며 환호하던 대중들의 앵콜을 사양하며 약간 상기된 얼굴로 자리에 돌아가 앉으셨다. 나중에 들으니 학생들 지도를 맡고있는 입장에서 한번은 그런 상황이 있을 것 같아 딱 한 곡만 연습하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왕에 하려면 제대로 해야겠다 싶어 최신 유행곡을 선택하신 것이었다.
시간이 되어 새 스님을 지도법사로 모실 때 스님은 깍듯한 태도로 후임스님을 소개하면서 법사의 인연이 소중했지만 이젠 공부에 더 신경을 써야한다고 매정하리만큼 똑 부러지게 법사의 인연을 매듭지으셨다. 있는 정을 다 뗄 것처럼 지도법사를 그만두시고도 개인적으로 만나면 늘 다정다감하셨고 공부에 전념하는 또 다른 모습으로 남으셨다.


쉼없는 공부…옥스포드大 박사


국제행사 큰 몫, 든든한 의지처


지금은 승가기본교육기관으로 지정되어 그렇지 않지만 과거 동국대학교는 스님들의 무덤(?)으로 통했다. 어렵게 대학공부를 마치고 나면 환속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4년의 대학생활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인생의 가장 자유로우며 활기가 있는 시간이다. 따라서 공부를 위해 진학한 스님들도 대학의 활기차고 자유로운 분위기에 젖어들 수밖에 없고, 또 아직까지도 군법사라는 제도는 조계종 스님들의 공식적인 결혼을 인정하고 있는 까닭에 환속의 유혹이 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불가에는 ‘굽은 나무가 산을 지킨다’는 말이 있다. 쭉 뻗은 나무는 서까래나 기둥, 대들보 감으로 다 베어지지만 굽은 나무는 아름드리 거목으로 자라 산을 지킨다는 뜻이다. 세상의 눈으로 볼 때 쓸모있어 보이는 사람은 출가 수행생활을 지속하기가 쉽지 않다. 자신의 안팎으로부터 오는 유혹이 그만큼 많은 것이다. 세상의 안목에서 볼 때 굽은 나무가 불가에선 오히려 더 귀하고 소중한 역할을 할 수도 있다.
미산스님처럼 우직하게 자신의 공부만 챙기는 스님은 눈에 쉽게 띄지 않는다. 혹 눈에 띄었다가도 홀연히 그 모습을 감추곤 한다. 마치 산을 지키는 거목처럼 쉬 자신을 팔지 않고 오롯하게 한길로 매진하는 까닭에 자신을 지킬 수 있는 것이다.
90년대 초반 강원을 마치고 인도 및 동남아시아 성지순례를 나서서 스리랑카에서 우안거를 날 때 우연히 미산스님의 소식을 듣게 되었다. 스리랑카와 인도에서 학업을 계속하여 석사과정을 마치고 또 공부를 더 하기 위해 영국으로 가셨다는 소식이었다. 대학을 졸업한지 10년의 세월이 흘렀는데 스님은 은근한 끈기와 쉼없는 노력으로 공부를 계속하고 있었다. 그저 조용한 가운데 자신의 공부를 챙겼다는 스님이기에 유학생들 사이에서 특별한 이야기 거리를 들을 수 없었다.
2년 전 불교계 신문에서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미산스님의 기사를 접하게 됐다. 세계적 명문으로 이름난 대학에서 한국 스님의 향학열과 구도열정이 그 결실을 맺은 것이다. 그리고 얼마 뒤 귀국한 스님을 만날 수 있었다. 거의 20년 세월을 넘어 스님을 뵙게된 것이다. 스님은 반가움에 어쩔줄 모르는 나에게 마치 어제 만났다 헤어졌던 사람처럼 그렇게 맞아 주셨다. 학창시절 법사의 인연으로 만났다가 출가의 세월이 익어 어느덧 종단의 소임을 보게된 후배를 스님은 스님의 늘 그런 담담함으로 격려하고 다독여 주었다. 많은 이야기를 듣고 싶었고, 묻고 싶은 이야기와 청하고 싶은 부탁이 많았지만 바쁜 스님의 발길을 잡기엔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다만 스님께 나중에 여건이 되면 우리 종단과 포교를 위해 조금의 힘이라도 도와달라는 부탁을 드렸고 스님은 흔쾌히 그러마는 대답으로 자리를 접었다. 그리고 미산스님은 다시 미국 하버드대학의 세계종교연구소 선임연구원으로 잠시 더 외국생활을 했다.
미국생활을 정리하고 귀국한 뒤 스님은 남방의 수행처와 국내의 선방을 다니시면서 바쁜 시간을 보내고 계셨다. 월드컵을 맞아 한국불교계에서 추진하던 템플스테이 일을 맡아 다시 서울로 온 나에게 있어 종단의 국제적 감각이나 제반 상황은 극히 열악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 마침 한국방문의 해 추진위원회와 함께 외교관과 그 가족들을 위한 시범 프로그램을 운영하게 되었고, 그 핵심 역할을 맡아줄 프로그램 진행 스님의 역할은 절대적이었다. 수 차례 논의와 회의를 거쳐 미산스님이 최적임자라는 결론을 내고, 당시 수행처에 계시던 스님께 어려운 부탁을 드렸고 스님은 거절하지 않으셨다. 템플스테이가 시작될 당시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불교계 대표행사인 연등축제가 한창이었다. 하지만 같은 기간 국내의 전체 일간지와 외신에까지 보도된 직지사에서의 외교관 템플스테이에 대한 기사비중은 오히려 연등축제를 압도할 정도로 성공적이었다. 발우공양을 비롯해 참선, 다도, 연등 만들기 등 미산스님의 유창한 영어로 진행된 가르침과 지도는 대다수 참석자들의 깊은 관심과 주목을 받았고 이후 템플스테이의 운영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종단의 유일한 국제포교인력 양성과정인 국제포교사연수와 국내외 거주 국제포교사 한국문화체험 등 스님의 도움이 필요할 때마다 미산스님은 수고와 번거로움을 아끼지 않으신다. 하지만 미산스님은 일을 아무리 해도 표를 남기지 않는 스님이다. 마치 흐르는 땀방울을 식혀준 바람이 자취를 남기지 않듯 어느새 산사의 고요속에 몸을 감추고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30년을 넘긴 출가수행의 이력은 스님의 한결같은 젊고 편안한 얼굴속에 갈무리되어 있다. 산사의 살림을 즐겨 백양사 참사람 수행원의 소임을 맡고 계신 스님은 주변사람들에게 늘 든든한 의지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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