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이 태어난 곳인 네팔의 룸비니 동산. 이곳에는 아쇼카석주, 마야데비사원과 연못이 자리하고 있다.

한 시대를 넘어 인류의 스승으로 추앙받는 석가모니부처님이 태어나 전법과 교화를 하고 열반에 든 인도와 네팔은 불자들은 물론 인류의 영원한 성지다. 오랜 역사를 간직한 인도와 네팔은 ‘신들의 나라’로 불리지만 세계 3대 종교인 불교의 모태가 되었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더해지고 있다. 이번호에는 불교의 발상지인 인도와 네팔의 4대 성지를 탐방해 본다.

부처님, 룸비니에서 태어나다

 

부처님께서 탄생하신 곳이 룸비니 동산이다. 현재 네팔의 영토에 속하며 부근의 공항은 바이라와에 있다. 인도와의 국경에서 약 20km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네팔에서는 육로로 카투만두 또는 포카라에서 룸비니(6~8시간)를 연결하고 있으며 인도에서 국경을 넘기도 한다.

약 2600년 전 석가족의 왕국이 이 지방에 있었고 국왕 정반왕(슛도다나 왕)의 부인 마야데비 왕비가 산달이 가까워지자 친정을 향해 길을 가던 중 그 일행이 카필라성과 콜리성 경계 근처의 룸비니동산에 이르러 휴식을 취했다. 이때 백화가 만발한 꽃동산을 거닐던 마야데비 부인이 꽃이 만발한 무우수 나무가지를 잡는 순간 갑자기 오른쪽 옆구리로 아기가 탄생했는데 그가 고타마 싯달타, 즉 인류의 스승인 부처님이다.

지금은 마야데비 부인을 기념하는 사당과 연못이 룸비니동산을 지키고 있고 B.C 249년경 아쇼카대왕이 이 성지를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아쇼카대왕 석주가 성지임을 입증하고 있다.

룸비니 동산에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탄생 장면을 묘사한 부조를 모시고 있는 마야데비(Mayadevi)사원이 있다. 11세기에 지어져서 1943년에 재건된 마야데비 사원은 마야 부인이 감잎나무가지를 손으로 잡고 연화대 위에 똑바로 서서 갓 태어난 어린 석가모니부처님을 지탱하고 있는 모습의 마야부인상을 모신 사원이다. 아쇼카왕의 석주 남쪽에는 성스러운 연못 푸스카니가 있다. 이곳은 마야부인이 부처님을 낳기 바로 직전 목욕을 한 곳이며 아기 부처님을 낳고나서 처음으로 씻긴 곳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부다가야에서 깨달음을 얻다

   
부처님이 깨달음을 이룬 부드가야 대보리사 전경.

 

불교성지 중 가장 중요한 의미를 지닌 곳이 바로 성불(成佛)의 땅, 보드가야이다. 부처님께서 구도의 일념으로 부귀영화를 버리고 29세의 나이로 출가한 이래 고명한 선인들을 찾아 가르침을 청하였으나 만족한 답을 듣지 못하자 입산하여 6년간 모진 고행을 수행하였음에도 올바른 깨달음을 얻지 못한다.

육체를 괴롭히기보다는 육체를 맑게 가짐으로써 마음의 안정을 얻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한 부처님은 네란자다 강으로 내려가 목욕을 하시고 마을 소녀 수자타가 고양해 준 우유죽으로 체력을 회복한 후 큰 나무 밑에 앉아 명상에 잠기시어 마침내 정각을 성취한다. 그곳이 바로 부다가야다.

부처님의 성불 이래로 그 나무는 보리수라 불리워지게 되었고 현재 부다가야에 있는 보리수나무가 있다. 부처님 성불 당시의 나무는 아니지만 그 후손쯤으로 여겨진다. 보리수나무 아래에는 부처님께서 좌선을 하고 있었다는 금강보좌가 있고, 그 돌에는 아쇼카시대의 양식을 전하는 기하학무늬가 조각되어 있다.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었다는 장소에 건립된 높이 52m의 9층 탑 내부에는 부처님의 좌상이 안치되어 있고 주위에는 4개의 소탑이 둘러싸고 있는 대보리사가 있다. 최초의 대보리사는 아쇼카왕이 건립하였고, 후일 회교도의 침공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인도인들이 퇴각할 때 흙속에 파묻혀 있다가 발굴되었다고 한다.

사르나트에서 최초로 법을 설하다

   
부처님이 처음 설법한 녹야원에 세워진 다베크 탑.

 

부처님은 부다가야에서 깨달음을 얻은 후 200Km가 넘는 곳을 이동한다. 갠지스 강을 건너 바라나시의 교외인 사르나트의 사슴동산(녹야원, 鹿野苑)을 찾아간다. 거기에는 콘다나, 아사지, 마하나마, 바디야, 바파 등 다섯 비구가 멀리서 부처님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들은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기 위해 부다가야의 가야산에서 수행을 함께 하다가 부처님을 비난하며 떠나간 수행자들이었다. “저기 고타마가 오고 있다. 그는 우리와 함께 수행하다가 고행을 버린 게으른 사람이다. 그가 오면 아는 척도 하지 말고, 맞이하지도 말자. 수행자의 의발(衣鉢, 옷과 발우)도 받아주지 말자. 옆에 오면 자리 정도는 펴 주자.”

그렇게 약속했던 다섯 비구들은 부처님이 다가오자 돌연 태도를 바꾸어 모두 일어나 의발도 받아주고, 발 씻을 물도 떠다 준다. 깨달은 자에게서 풍겨 나오는 분위기에 압도됐기 때문이다. 한 비구가 부처님을 향해 “친구여, 고타마여”라고 부르자 부처님은 말했다.

“그대들은 여래(如來)를 ‘고타마’라고 불러서는 아니된다. 여래는 마땅히 공양을 받을 자이고, 바르게 깨친 자. 수행자들이여, 귀를 기울이라. 나는 불멸을 얻었노라. 나는 이제 법을 설하리니, 그대들도 따라 행하면 스스로 체득하리라”

그러자 다시 비구들의 비판이 이어졌다. “고타마여, 고행으로도 얻지 못하던 것을 사치하고 타락한 그대가 어찌 얻었단 말인가?”

부처님은 당당하게 말한다. “그대들은 과거에 내 얼굴에서 이처럼 광명이 넘쳐 빛나는 것을 보았는가?” 다섯 비구들은 부처님의 얼굴에 빛나는 광명을 보고 그제야 진리를 깨달은 성자임을 알고 부처님께 귀의한다. 부처님은 중도(中道)법문을 내린다. 사르나트에는 ‘진리를 본다’는 뜻의 다메크 탑이 세워져 있다.

쿠시나가르에서 열반에 들다

   
열반에 든 쿠시나가르 열반당 모습.

 

45년간의 전법을 하던 부처님은 80세에 이르러 쿠시나가르에서 열반에 든다. 이미 열반에 들 것을 예감한 부처님은 아난존자를 동행하고 당시 마라족의 도읍인 쿠시나가르로 발걸음을 옮긴다. 쿠시나가르의 교외에 도착한 부처님은 45년 동안의 끝없는 교화와 설법활동을 마감하고 제자 아난다가 지켜보는 가운데 두 그루의 커다란 사라나무 사이에서 80년의 생애를 마감한다.

비통해하는 제자들에게 부처님은 ‘진리의 가르침에 의지하라’고 당부하고 열반에 든다. 과거에는 수많은 탑과 사원이 있었다고 전해지는 쿠시나가르는 열반탑과 일부 사원만 남아 있다. 동쪽 1km쯤에는 벽돌탑으로 만들어진 무덤이 있다. 부처님의 유해가 다비(화장)된 터로 알려져 있다. 열반당 안에는 일생동안 이루어야할 업을 완전히 끝내고 육체를 떠나 우주의 영원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부처님의 장엄한 모습과 열반상이 모셔져 있다.

노우진 대승투어 차장은 “우기가 끝나는 요즘 시기부터 내년초까지 부처님 성지를 순례하기 좋은 계절”이라며 “불자라면 꼭 한번 불교 4대 성지 순례를 권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