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s | 조계종 국제 무대 나서다 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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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관리자 작성일11-01-28 11:20 조회2,998회 댓글0건페이지주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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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을 방문한 한국의 스님들. 가운데 청담스님, 벽안스님 등의 모습이 보인다.
국제대회 통해 스님들 점차 해외 문물 눈떠
당시는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 아래 동남아 국가와의 교류를 펼쳤기 때문에 현지에 가면 대사 등 현지 외교관이 직접 스님들을 안내했다. 일본과 국교가 수립되기 전 방문이 불편하던 시절에도 스님들은 큰 어려움 없이 일본을 방문하고 체류할 수 있었다. 모두 정부의 지원 덕분이었다. 세계불교도우의회를 통한 활동 역시 정부의 지원과 후원 속에 활발하게 전개됐다. 1960년대 후반부터는 한국 개최가 몇 차례 나왔지만 우리 측의 준비 부족, 열악한 환경 등으로 인해 무산됐다. 또 다양한 형태의 불교대회가 마련됐다.
동남아 불교국가 순례하며 승가교육 중요성 배우기도
한 번 나가면 몇 개월씩 체류…국내 돌아와 문화 전파
1966년 5월8일 제1차 세계불교승려대회가 스리랑카에서 열렸다. 이 대회에는 구산스님, 자운스님을 단장으로 홍교스님 등 3명이 대표로 참석했는데 스님들은 행사 4개월 전에 출국했다. 미리 각국을 둘러보고 견문을 넓히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구산스님은 도중에 병을 얻어 귀국하고 자운스님과 홍교스님이 예정된 일정을 감행했다.
1966년 11월 태국 치앙마이에서 열린 제8차 대회에는 윤월하스님, 김홍교스님, 이한상 불교신문 사장, 홍순만 전국신도회장, 최진환 법화종 대표, 이의근 불교신문 외신부장 등이 참석했는데 한국은 이 대회부터 정식으로 세계불교도우의회에 가입했다. 그 이전 한국은 중요한 결정을 한다. 1956년 제4차 대회에서 결정한 불기와 오색기 사용, 주황색 가사 통일에 대해 한국불교가 함께 할 것을 결의한 것이다. 1966년 8월 제13회 중앙종회였다.
이에앞서 제7차 대회에서 불교도대회의 결의를 각 국이 이행하지 않는다는 지적이 나왔다. 종단 내에서는 자운스님이 한국불교가 세계 불교국가와 보조를 맞춰야한다는 지적을 했다. 자운스님은 제1회 세계불교승가대회에 참석하기 전 4개월여간 대만 베트남 태국 인도 등 동남아불교국가를 순방하며 국제적 감각을 익혔다. 그 결과를 불교신문에 ‘보고기(報告記)’라는 이름으로 기고했는데 그 핵심 내용은 우리도 불기를 통일하고 불교기를 사용하자는 주장이었다. 스님은 이를 한국불교의 고립 탈피와 국제화라고 강조했다. 이후 8월 열린 중앙종회에서 서운스님 혜정스님 등의 제안에 따라 1967년부터 1월1일자로 불기를 2500년대로 변경하고 불교기를 사용하기로 결의한다. 이 결의가 유효했는지 조계종은 제8차 대회부터 세계불교도우의회 정식회원국으로 가입한다.
그리고 이한상 불교신문사장이 처음으로 WFB 부회장에 피선된다. 제8차 대회는 공산권 국가의 지부 가입 문제로 시끄러웠다. 북한 소련 북베트남 등 공산권 국가도 회원국이었지만 지부 인정은 받지 못한 상태였다.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양 진영에 속하지 않은데다 공산권에 우호적이었던 동남아의 불교국가 영향력이 강한 WFB는 이들을 지부로 인정하기로 한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 대회에 메시지를 보내며 각별한 관심을 표한다. 한국은 출국전 제9차 대회를 유치한다는 목표를 세웠지만 실패한다.
<사진>1956년 네팔에서 열린 세계불교대회에 참가한 청담스님, 금오스님과 이기영 박사 모습.
제9차 대회는 1969년 4월12일부터 20일 까지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열렸다. 한국은 김동익 동국대 총장을 단장으로 이한상 불교신문 사장, 박완일 전국신도회 사무총장, 김삼용 원광대 처장을 비롯한 6명이 참석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 대회에도 메시지를 보냈다. 한국은 이 대회에서 또 제10차 대회 유치를 결의하고 이를 적극 추진한다. 하지만 10차 대회는 스리랑카가 개최지로 선정된다.
세계불교도대회 유치에 실패한 한국은 1970년 세계불교지도자 대회를 개최했다. 한국은 이후에도 서울 대회 개최를 위해 노력하지만 성사되지 못한다. 1973년 8월26일부터 28일까지 세계불교도우의회 이사회가 한국의 타워호텔에서 열려 1975년 제11차 대회를 4월23일부터 30일까지 서울에서 열기로 결정하지만 11차 대회는 1976년 2월 태국 방콕에서 열린다. 그리고 제12차 대회는 1978년 10월 일본 도쿄에서 열려 종정 고암스님, 총무원장 성수스님을 비롯 44명이 참가한다.
한국은 WFB를 통해 활동을 펼치는 한편 1966년부터는 보다 폭넓게 움직인다. 특히 일본과 국교가 수립되면서 일본 불교와의 교류를 활발하게 펼친다. 1966년 한 해만 5월 구산스님을 단장으로 스리랑카에서 열린 승려대회 참석, 손경산 총무원장 스님의 태국 베트남 일본 친선방문, 숭산스님을 대표로 한 재일 홍법원 설치 추진 움직임이 있었다. 그리고 연말에는 세계불교도대회와 더불어 11월에는 청담스님이 일본을 방문한다. 당시 언론은 이를 두고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가 일본을 방문한 이래 스님으로서는 처음으로 일본을 국빈 방문했다며 의미를 부여했다. 청담스님은 한국불교사회봉사회 총재 자격으로 사무총장 능가스님 등과 함께 일본 정부의 초청을 받아 일본을 방문했다. ‘국빈방문’ 답게 스님은 일본에서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일왕 외에는 유숙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관수사의 방에서 머물게 하고 각종 언론 매체와 기자회견을 주선했다. 스님은 한일간 우호 정진에 불교가 앞장서자는 연설을 했다. 1965년 한일 수교 이후 양국 관계를 개선하려는 두 나라 정부의 이해 관계가 맞아떨어진 셈이다. 또 이 때부터 미국 포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일본이 미국에 포교당을 내는 것을 보고 자극 받은 것이다. 미국 포교는 1970년대 들어서면서 본격화 한다.
잦은 해외 순례는 스님들에게 새로운 안목을 심어주었다. 스님들 중에서도 자운스님이 특히 해외 순례에 적극적이었다. 자운스님은 홀로 4개월간 동남아 각국을 순례하며 문물을 익혔다. 그리고 해외 순례의 중요성을 한국에 돌아와 전파했다. 때로는 불교신문에 기고해 세계불교계의 흐름을 알렸고 강원에서 학인들에게 해외문물을 영상 슬라이드로 제작해 교육했다. 상좌에게도 ‘꼭 외국에 나가라’고 당부했다. 당시 해인사 강원에서 수학했던 일면스님(생명나눔실천본부 이사장)은 “자운스님께서 해외 순례를 마치고 돌아오셨다. 사진을 찍어 이를 슬라이드로 제작해 우리에게 설명하면서 반드시 해외로 나가라고 당부하셨다”고 회상했다.
오랫동안 자운스님을 모셨던 혜총스님은 “노 스님들 중에서 해외 순례에 가장 적극적인 분이 자운 큰스님이었다고 생각한다. 늘 나를 불러 외국에 나가야한다고 강조하셨는데 나는 어린 마음에 ‘한국도 좋은 곳이 많은데 왜 돈을 써가며 외국에 나가야하나’는 생각에 큰 스님의 생각을 따르지 않았다. 그런데 나중에 WFB 한국 대표단으로 미국을 방문한 뒤 생각이 바뀌었다. 왜 혜초 등 삼국시대부터 스님들이 목숨을 걸고 순례를 하는지 외국에 나가면서 알게 됐다”고 말했다. 총무원장을 역임한 경산스님 역시 외국의 새로운 문물에 감동했는지 제7차 WFB 대회가 열린 인도와 인근 불교국가를 방문하고 그 과정을 순례기 형식으로 불교신문에 수차례 기고한 바 있다.
한번 나가기 어려운 해외여행 탓에 스님들은 한번 가면 여러 곳을 거쳤다. 경산스님도 1965년 11월28일부터 일본 홍콩 태국 미얀마 스리랑카 인도 네팔 등지를 2개월 가까이 순례했다. 스님은 기고문에서 홍콩 등 더운 나라의 이국적 풍물과 낯선 언어, 그리고 같은 불교권이면서도 우리와는 확연히 다른 태국불교문화에 호기심을 가득 보였다. 가령 신도들이 공양을 올리는 모습이라든지, 우리와는 다른 동남아의 가사 등을 지적하며 세계불교와의 동질성에 대해 고민한다. 스님들은 외국과의 비교를 통해 우리가 배워야할 바를 생각하고 한국불교가 가야할 길도 생각했다. 경산스님은 태국의 불교대학을 둘러보고 이런 각오를 다진다. “불교는 시대를 앞장서왔음에도 오늘날에 와서 한국의 불교는 시대에 끌려가는 느낌이다. 이제 한국불교가 새로운 국면의 타개를 눈앞에 두고 갈증처럼 요긴한 것이 젊은 후진의 양성이다. 이 후진 양성을 위해 승가대학의 개설을 서둘러야겠다는 나의 결심은 더욱 굳어진다.”
한·일 수교 이후 일본 불교와 유대 강화…홍법원 설치
80년대 이후 WFB 중요성 떨어져 정부·종단 관심 시들
1980년대 들어서면 세계불교도대회는 종단의 관심사로부터 멀어진다. 경제력을 바탕으로 외교무대에서도 북한보다 발언권이 강화돼 정부 차원에서 불교도대회의 외교적 가치가 떨어진데다 정권이 바뀌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대회에는 종단 지도부가 빠지고 주로 재가자들이 중심이 돼 참가했다. 1988년 대회는 미국에서 열렸는데 부산을 대표하는 혜총스님이 단장으로 부산 신도들을 인솔해서 참가했다. 그나마 1994년 종단 개혁 후에는 조계종은 완전히 손을 뗀다. 대신 1990년대 중반부터 중국과 국교수립으로 한중일 삼국 불교교류가 중심을 차지한다.
종단차원에서 교류가 단절되었던 세계불교도우의회는 지난해부터 다시 복원됐다. 2010년 스리랑카에서 열린 제25차 대회에 조계종 사회부장 스님이 참석하고 2012년 26차 대회를 한국 여수에서 열리는 엑스포기간에 맞춰 개최할 것을 희망한다고 제안해 승낙을 받았다.
박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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