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s | 세계불교를 가다 ⑧ 특별기고 / 1000년 전의 ‘한국불교 세계화’(불교신문 11/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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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관리자 작성일11-10-24 16:24 조회3,022회 댓글0건페이지주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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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0년을 면면히 이어온 한국불교를 지구촌에 널리 알려야할 사명이 지금 우리들에게 있다. 하지만 역대 조사들은 세계 곳곳에 한국불교의 자취를 남겼던 것도 사실이다. 험준한 산과 강을 건너고, 집채만한 파도와 싸우며 부처님 진리를 배우기 위한 고행(苦行)을 감내했음을 잊어선 안된다.
고구려, 백제, 신라 구법승(求法僧)들의 발자취를 돌아보며 한국불교 세계화 실현을 위한 발원을 해보고자 한다.
한국불교가 본격적으로 세계와 만난 것은 6세기말이었다. 삼국시대 수많은 수행자들이 대륙과 바다를 건너 불법(佛法)을 배우고자 했다. 이 같은 열정은 10세기 초까지 계속됐다. 당시 중국은 수나라와 당나라 시기로 봉건사회에 진입하는 전성기였다.
외래불교종교인 불교가 부처님의 사상을 중국에 토착화 시킨 중요한 시기였다. 수나라와 당나라는 동양사회의 중심이었고, 서양과도 적지 않은 교류를 하고 있었다. 즉 세계 문명의 큰 줄기가 만나는 중심지였다. 이때 삼국의 스님들이 대거 중국으로 건너가 선진문물을 배우고 익히는 한편 한국불교의 존재를 알렸던 것이다.
수.당 시기의 중국불교는 선종, 천태종, 화엄종, 정토종 등이 중요한 지위를 갖고 있었다. 삼국과의 교류 과정에서 불교를 전했으며, 특히 신라는 7세기 중엽에 한반도를 통일하면서 그 정신문명의 배경에 불교를 두고 있었다.
고구려, 백제, 신라는 중국을 통해 불교를 받아들인 후 주변국가와 활발하게 경제.문화교류를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적지 않은 수행승들이 중국을 기반으로 구법(求法) 활동을 시작했던 것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구법활동에 참여한 최초의 승려는 고구려 승랑(僧朗)스님이다. 이어 백제의 겸익(謙益)스님과 현광(玄光)스님이 부처님의 근본적 사상을 배우기 위해 이역만리 인도까지 건너가 성지를 참배했다. 앞서 지적했듯이 당시 출가 수행자들은 육로(陸路)나 해로(海路)를 통해 부처님 나라인 인도를 방문해 성지를 참배하고 불경(佛經)과 사리를 모셔왔다. 목숨을 건 여정이었다.
생과 사를 초탈한 수행자들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신라 승려 현덕(賢德)스님과 낭지(朗智)스님도 당나라에 가서 성지를 참배하고 부처님 사리를 모셔와 흥륜사에 봉영(奉迎)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또한 신라의 의신(義信)스님과 법운(法雲)스님도 당나라를 거쳐 인도까지 구법의 정진을 했다. 이때 불경을 이운해 왔다고 한다.
죽음을 각오한 구법승들의 노력으로 부처님의 위대한 사상이 인도와 중국을 거쳐 한국은 물론 일본까지 전해졌다. 이로 인해 고해(苦海)에 빠진 중생들에게 한줄기 희망을 선사했다. 민중의 삶이 이전과 확연하게 달라진 것이다.
6세기부터 10세기까지 이어진 수백 년간의 구법여정을 살펴보면, 이 기간에 중국과 인도를 방문한 스님은 약 150여명에 이른다. 나라별로 살펴보면 신라 스님이 117명으로 가장 많다. 이어 백제 스님이 18명, 고구려 스님이 16명이다. 150여명의 스님은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분들이고, 기록에 없는 구법승은 이보다 더 많을 수 있다.
구법의 여정에서 이름도 남기지 못하고 스러져갔을 스님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려온다. 구법승의 해외여정은 고려까지 이어졌다. 고려시대의 마지막 구법승은 혼수(混修)스님과 혜근(慧勤)스님을 꼽을 수 있다.
한편 645년(정관 19년) 1월에 8명의 구법승들이 인도를 순례하고 당나라로 돌아온 현장스님을 도와 역경사업에 참여했다. 당시 당태종 이세민의 적극적인 지원 하에 부처님경전을 한역(漢譯)하는 사업에 참여했던 것이다. 이 스님들은 고구려, 백제, 신라에서 온 분들이었다. 8명의 구법승과 그들의 활동 내용은 다음과 같다.
원측(圓測)스님은 15세 때 당나라에 가서 유식을 배웠고 현장스님의 상수(上首)제자가 됐다. 서명사(西明寺)에 주석한 대덕(大德)이었으며, 원측스님은 범문(梵文)에 능통해 현장스님의 역경사업에 처음으로 참여해 <대승밀엄경> <대승습식경> <보우경> <화엄경> 등을 번역했다.
지인(智仁)스님은 647년(정관21년)에 흥복사에서 <인명입정이론(因明入正理論)> <반야바라밀다심경> <인명정이문론(因明正理門論)>을 번역했다.
신방(神昉)스님은 어린 시절 당나라에 들어가 장안 법해사(法海寺)에 주석하면서 현장스님을 만났다. 홍복사(弘福寺)에서 진행된 역경사업에 참여했다. 현장스님을 20년간 시봉했다. 현장스님 입적 후에도 마지막까지 역경사업에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현범(玄範)스님은 신라인으로 소년시절 출가해 당나라에 들어갔다. 정통유식학과 인명(因明)을 배운 현범스님은 장안 보광사에서 현장스님 만났다. <성유식론소 20권> <해심밀경소 10권> <섭론소 7권> <인명정리문론소 1권> <인왕경소 4권>을 번역했다.
의적(義寂)스님은 신라 출신이다. 현장스님의 제자 규기계의 제자로 <법화경론술기 3권>과 <보살계본소 2종>을 번역했다. 현범스님과 이적스님은 당대(唐代) 유식학(唯識學)의 6대가(六大家)에 속한다.
신곽(神廓)스님은 <동성전록>에 의하면 신라인으로 당에서 현장스님을 만났다. 번역 사업에 참여해 <섭론무성석론소 11권>과 <관소록록론소 1권>, <섭대승론장 5권>을 번역했다.
성장(莊)스님은 당나라에서 원측스님을 만나 현장을 알게 되었다. 원측스님의 제자로 역경을 도왔다. 세속 나이가 가장 어린 스님이었다. 696년(통천 원년) 7월 입적한 원측스님의 다비를 낙양 용문 향산사(香山寺)에서 엄수하고, 유골을 장안 종남산 풍덕사에 모셨다고 한다.
도륜(道倫)스님은 현장스님에게 법상(法相) 유식학(唯識學)을 배웠으며 저명한 학자가 되었다. 혹설에는 규기스님의 제자라고 알려졌다. 저서로는 법상 유식학 관련 서적이 많다. <약사.경소 1권> <성유식론 요견> 등 2권을 번역했다.
이처럼 8인 구법승은 현장스님과 깊은 인연을 맺고 역경사업에 적극 참여했다. 역경장(譯經場)이 해산할 때까지 공헌한 구법승들이다. 중국 승람지 기록에 의하면 618년(당나라 무덕 원년)에 한반도 구법승들이 가장 많이 입당했다고 한다. 당시 현장스님에게 유식(唯識)을 배우고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이와같이 삼국시대에는 수많은 구법승들이 중국과 인도를 순력(巡歷)했다. 그것은 부처님 진리를 보다 가까이서 느끼고 싶은 수행자의 열정과 원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구법승들은 목숨을 건 여정을 수행의 한 과정으로 받아들이고, 그 결과를 대중에게 회향하고자 최선을 다했다.
한국불교 세계화의 서막(序幕)을 열었던 선대 조사들의 치열한 구법행과 구도행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종단에서 의욕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한국불교 세계화 또한 선대조사들의 열정과 원력을 계승해 성공적으로 회향되길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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