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s | 일본 불교문화 꽃피운 주인공은 한반도 도래인(渡來人, 물을 건너온 사람)(불교신문 15/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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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여여심 작성일15-06-22 16:04 조회2,110회 댓글0건페이지주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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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성왕, 불상 경전 등 보낸 이후
한일 양국 다방면으로 교류 전개
인적·물적 총제적인 분야에서
지속적으로 행해진 ‘문화 대이동’
현재 한일 양국 불교도들은 1977년 발족한 한일불교문화교류협의회를 중심으로 지속적인 교류를 이어가고 있다. 사진은 지난 2009년 5월 양국 불교계가 잘못된 과거사를 참회하고 인류 공생과 화합을 기원하는 뜻에서 여주 신륵사에 ‘인류화합공생기원비 제막식’을 가진 장면. 불교신문 자료사진 |
6월22일 한·일 국교 정상화 50주년을 맞아 새롭게 한국과 일본의 교류사를 되돌아보는 특별기획을 마련했다. 특히 고대 일본으로 건너간 백제인들은 불교와 문화, 선진기술 등 다양한 문물을 일본에 전파했다. 이번 기획을 통해 불교를 중심으로 한일 교류의 역사를 되짚어 보고 새로운 한일 관계를 모색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점 등을 싣는다. 또 한국불교와 일본불교의 비교분석, 일본불교 신행, 앞으로의 바람직한 교류방향 등을 모색할 예정이다.
일본 국민들 사이에 ‘고액권 지폐의 얼굴’로 널리 알려져 있는 인물이 있다. 일본 고대사에서 성인으로 추앙받고 있는 쇼토쿠 태자(聖德, 574~622)이다. 그는 일본에 전래된 불교가 정착하는데 크게 기여한 인물이기도 하다. 인도에서 발원한 불교는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로 들어왔고 다시 한반도에서 일본 열도로 전래됐다. 백제 성왕은 552년(538년이라는 설도 있음) 왜에 사신을 파견해 불상과 경론 등을 보냈다. 그런데, 당시 일본에 800만이나 되는 신에 대한 재래 신앙이 있었는데 일본은 불교 공인 여부를 둘러싸고 모노노베씨와 소가씨 사이에서 극심한 내홍을 겪게 된다. 소가씨 일족을 비롯한 숭불파는 한반도 삼국 등에서 건너와 정착한 도래인(渡來人) 호족이었고, 배불파는 일본의 토착세력이었다. 결국 쇼토쿠 태자가 이끈 숭불파와 배불파 사이에서 전투가 발발, 모노노베 일족이 패함으로서 끝이 난다. 태자는 고구려가 파견한 혜자스님과 백제의 혜총스님으로부터 불교를 배우고, 국가체제를 정비하고 불교를 국가 통치 이념으로 채택했다. 포교를 위해 사재를 털어 나라현에 호류지(법륭사)를 지었고, 17조 헌법을 제정해 불법승 삼보를 공경할 것을 명했다. 이런 태자의 노력으로 일본은 처음으로 고대국가 형성의 틀을 다지게 됐다.
불교 초전 이후에도 삼국으로부터의 불교전래는 계속된다. 경전(經典), 조불공(造佛工), 조사공(造寺工) 등을 보낸 백제 뿐만 아니라 고구려와 신라에서도 역시 불교가 전해졌다. 당시 한반도로부터의 불교전래는 불법승 삼보는 물론 불교문화 전반에 걸친 인적·물적의 총제적인 분야에서 지속적으로 행해진 ‘문화의 대이동’이었다.
쇼토쿠 태자가 불교를 정착시켰다면 이후 불교를 사회 저변으로 침투시킨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교키(行基, 668~749)스님이라는 분이다. 특이한 점은 스님이 백제에서 건너 온 왕인(王仁)박사의 후손인 도래인 출신이라는 점이다. 일왕에 의해 일본 최고위 승직인 대승정에 임명된 스님은 일본 불교계의 대표적인 고승이다. 지난해 일본 오사카 사카이시는 민중불교 지도자로 활약한 스님이 백제 후손이라는 사실을 적은 한글병기 안내판을 주요 사적지에 설치했다는 소식을 알려 세간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스님을 통해 도래인이 일본에서 큰 역할을 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 당나라를 여행하고 온 일본의 엔닌(圓仁)스님은 신라인들과 교류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엔닌스님의 입당구법 여행은 당시 당나라와 신라, 일본을 잇는 해상무역을 주도한 장보고를 비롯해 신라인 없이 이뤄질 수 없었다. 마르코 폴로가 중국에 오기 4세기나 앞서서 엔닌스님은 깨달음을 찾기 위해 위험한 역경을 헤치며 일본에서 중국으로 건너갔다. 9년 이상이나 당나라를 여행하면서, 지금은 세계 3대 여행기 중 하나로 꼽히는 <입당구법순례행기>도 썼다. 현재 교토국립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이 고본에는 장보고(張保皐)를 ‘보배롭고 높은 존재’라는 의미에서 장보고(張寶高)라고 표기했다.
고려시대는 한반도 역사상 이민족과의 접촉이 가장 많았던 시기에 해당한다. 하지만 일본과의 관계는 공식적인 외교관계가 수립되지 못했다. 이는 9세기 후반 일본정부가 자국의 경제적인 형편을 고려해 대륙과의 교섭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다만 동북아시아 삼국은 지역적으로 근접해 있어 일정한 접촉이 오고 갔다. 11세기 후반 고려에서 간행된 속장경(續藏經)은 상인이나 혹은 스님들을 통해 중국과 일본에 유포됐으며 그곳에서 간행 또는 필사됐다.
조선전기 일본과의 교류의 중심에는 고려대장경이 있었다. 카이 히데유키 일본 붓교대학 교수는 ‘고려판(高麗版) 대장경(大藏經)과 중세의 일본’이라는 논문을 통해 “고려판이 일본에 들어온 후 개판(開版)할 때 저본이 됐는데 그 사실만 보더라도 텍스트로서 고려판이 얼마나 높은 평가를 받았는지 알 수 있다”고 밝혔다. <조선왕조실록>을 살펴보면, 쇼군(將軍, 일본무신정권인 막부 수장)이나 모든 다이묘(大名, 지방 영주)의 사절을 통해 고려대장경을 보내달라는 외교 요청이 60회에 이른다. 일본 측이 이를 수입한 기록은 40회 정도 나타나고 있다. 특히 불교를 신봉했던 세조(世祖) 임금은 간경도감을 설치해 불전(佛典)을 인쇄, 일본 사절이 요청하는 대로 불서를 종류대로 증여해 주었다. 이에 일본 사절들은 세조를 ‘불심(佛心)의 천자(天子)’라 칭하는 등 그의 업적을 널리 샀다. 세조의 이러한 국정운영으로 일본 각 지방 사찰에까지 조선판 불전이 널리 유포될 수 있었다.
이후 조선시대를 지나 일제시대를 거쳐 해방 후까지는 역으로 일본불교가 우리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 시기에 해당한다. 일제강점기는 근대적인 불교제도의 수용을 촉진케 하는 등 불교 근대화에 자극을 주었다. 조선시대 산중불교에서 탈피해 대중불교로 나가려는 한국 스님들의 의식과 맞물려 종헌, 종법, 본·말사 제도 등 근대적인 종단으로 활동케 하는 계기를 제공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의 불교는 전통불교의 퇴진이라는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왔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일본불교의 영향으로 불교의 세속화가 가속화 되면서 막행막식(莫行莫食)이 자행됐으며, 스님들의 결혼이 수용된 것이 그 대표적 예이다. 해방 직후 한국불교의 선지식들은 식민지 불교를 청산하고 불교 본연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는데 뜻을 모으고 수행에 매진하면서 일제 잔재 청산에 힘을 기울였다.
해방 이후 한일 불교관계는 1966년에 재일 홍법원이 도쿄에 개설되고부터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초대 홍법원장에 숭산스님이 취임하면서 한일 불교문화교류도 구체화 된다.
스님은 한일 간 긴장을 완화시키고 화해를 촉진시킨 상징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1960년대 중반, 당시 초동에 동국대 기숙사로 사용되던 건물이 있었다. 원래는 일본의 서본원사 별원이었다. 이 건물을 헐고 공사를 진행하던 중 지하실에서 4000여구에 달하는 일본군 유골이 나왔다. 당시 스님은 동국대 상무이사와 총무부장을 겸직하고 있었는데, 교내 담당자들은 유골을 없애는 방향으로 의견을 모았다. 그러나 스님은 “아무리 적국 유골이라 할지라도 다 버린다는 것은 나중에 그 후손들이 찾을 때 문제가 될 것이다”며 그 방침을 만류했다. 스님은 동국대 총장과 협의를 거쳐 화계사 명부전으로 모든 유골을 이전하게 됐다. 스님의 이러한 선견지명은 오래지 않아 빛을 발하게 된다. 얼마 후 한국과 일본 간의 국교 정상화가 성립되는데 당시 방한했던 기시 수상을 수행했던 일본 기자들에게 이 사실이 알려져 주요 일간지들이 대서특필 하게 된다. 이후 일본은 공식적으로 정치인과 스님들을 방한시켜 유골을 인수해 갔고 이를 계기로 일본에 흩어져 있던 많은 한국 동포들의 유해를 국내로 송환하게 되는 쾌거를 얻었다.
현재 한일 양국 불교도들은 1977년 발족한 한일불교문화교류협의회를 중심으로 지속적인 교류를 이어가고 있다. 1977년 10월 제 1차 서울대회를 시작으로 매년 양국이 번갈아 대회를 진행하며 학술·문화교류 등을 실시하고 있다. 그간 양국 불교도들은 과거 일본이 저질렀던 잘못을 참회하며 전쟁희생자를 위령하고 전쟁 없는 평화를 기원하는 의미에서 기원비를 설립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김춘호 한국일본불교문화학회 편집이사는 “한국불교가 우리에게 큰 영향을 끼쳤듯 일본도 고대에 불교가 전해진 이래 존중받는 중심 문화로 기능해 왔다”며 “정치색이나 선입견 등을 내려놓고 일본불교를 바라볼 때 보다 객관화된 이해도 가능해 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위안부 문제…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과거사
한일 양국은 6·25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10월 예비교섭을 시작으로 14년간의 협상 끝에 1965년 마침내 한일협정을 체결, 국교정상화를 이뤘다. 그러나 이후 어느 한 시기도 한일 관계는 조용한 날이 없었다. 일본 지도자들의 왜곡된 역사인식, 일본군 위안부와 강제징용 문제,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 등 갈등 요인이 곳곳에서 형성돼 있다.
올해만 벌써 위안부 피해 할머니 5명이 일본의 사죄를 듣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정부에 등록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는 238명이지만 이미 188명이 별세해 생존자는 50명에 불과하다. 위안부 피해자들은 20년이 넘도록 일본 정부에 책임을 인정하고 공식 사과와 함께 법적 배상을 요구해 왔지만 일본 정부는 회피로 일관해 왔다. 문화재 문제 또한 중요 현안 중 하나다. 당시 우리 정부는 조선총독부가 일본으로 가져간 고분 출토품과 일본인 개인이 약탈한 문화재 등 4479점을 돌려달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일본은 개인 소유 문화재를 제외하고 국·공유 문화재만 반환했다. 1966년에 돌아오지 못한 약탈 문화재 중 대표적인 것이 오구라(小倉) 컬렉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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