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소식

News | 혜국스님, 아잔간하, 아잔브람 ‘세기의 무차토론’ (불교신문 16/02/27)

페이지 정보

작성자여여심 작성일16-02-29 16:53 조회2,496회 댓글0건

본문

icon_p.gif 

왼쪽부터 각산스님, 아잔간하, 아잔브람, 통역자, 혜국스님

 

세계적인 수행자들의 가르침을 직접 듣고 실제 수행하는 세계명상대전이 성황리에 진행되고 있다.

지난 25일부터 28일까지 강원도 하이원리조트 컨벤션홀에서 열리고 있는 세계명상대전은 이틀째인 27일 혜국스님, 아잔간하, 아잔브람이 참석한 가운데 ‘세기의 무차토론’을 가졌다.

1500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세계명상대전 조직위원장 각산스님(참불선원장)의 사회로 진행된 ‘무차토론’은 세 스님이 수행법에 대한 견해를 밝히는 기조법어로 시작했다.

이어 세 스님은 상호 질의응답을 통해 불교의 수행법과 교리에 대한 의견을 교환했다. 또한 방청석과 기자들의 질문을 받고 답을 제시하는 등 2시간을 넘기며 뜨거운 열기 속에 진행됐다.

평생 간화선 수행을 하고 있는 충주 석종사 선원장 혜국스님은 기조법어에서 “화두란 부처님께서 깨달은 연기법을 깨달은 스승이 오직 중생들에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공성(空性)을 마음의 언어로 보여주신 것”이라면서 “(중국의 고봉선사는) 오직 본참공안(本參公案) 화두를 가슴 깊이 간직하고 행주좌와(行住坐臥)에 인생을 바쳐 간절하게 참구하라고 하셨다”고 설했다. 또한 혜국스님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기후나 문화에 따라서 다양성을 갖고 많이 퍼져서, 꼭 한 가지 방법으로 통일되기를 바라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icon_p.gif 

행사장에 입장하는 혜국스님, 아잔간하, 아잔브람을 청중이 박수로 환영하고 있다.

 

이어 동양의 참선(명상)을 서양에 전파하고 있는 아잔브람은 “수행을 하는 것은 무엇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려놓기 위한 것으로 깨달음은 얻는 게 아니다”면서 “아무것도 남지 않을 때까지 계속 내려놓는 것”이라며 “모든 것이 사라지는 때, 거기에는 무(無). 아무것도 없다”고 밝혔다.

‘태국불교의 전설’로 불리며 존경받는 아잔간하는 “나는 말을 잘 못 한다. 여러분에게 얼굴을 보여 드리려고 온 것”이라며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짤막하게 설했다. 하지만 사회자와 청중이 재차 요청하자 무차토론 이전에 아잔간하가 설한 내용을 아잔브람이 대신 전했다. 아잔간하는 “불자의 본분, 인간의 본분은 무엇을 얻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이라며 “한국의 많은 사람들이 굉장히 많은 것을 얻으며 자기 성취를 하고 있지만, 남들이 행복하도록 주는 것은 흔치 않다”고 했다. 아잔간하는 “내가 얼마나 얻느냐를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남에게 많이 줄 때 나도 남도 행복해진다”며 “우리가 더 많이 줄수록 우리나라, 모든 가족, 모든 절들이 더 번창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icon_p.gif  

다음은 ‘세기의 무차토론’의 일부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혜국스님 = (두 분 스님께) 아무것도 없다고 했는데, 간화선에서는 아무것 없다는 ‘그놈’은 지금 어디 있느냐를 찾는다. 그 이야기를 듣고 싶다.

아잔브람 = 그 답을 하는 사람은 없다. 그냥 답이 있을 뿐이다.”

혜국스님 = “간화선과 남방불교의 차이를 여기에서 느끼게 된다. 왜냐면 아무것도 없다고 할 때는, 아무것도 없다는 사람이 있을 때 그 말이 나온다. 간화선은 아무것도 없는 위치에 가면 아무것도 없는 언어가 나온다. 아무것도 없는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 간화선의 세계이다. 지금도 아무것도 없다고 하면 아무것도 없다는 그 사람이 있는데, 그 말을 해줄 수 없다는 것이 남방불교와 간화선의 차이이다. 나는 아무것도 없다는 거기에 머물면 안 된다는 주장이다. 아무것도 없다는 거기서 몰록 백척간두(百尺竿頭) 진일보(進一步)해서 아무것도 없다는 그놈과 아무것도 없는 것과 완전히 일치 되면 그때는 바로 본지환원이다.

(청중 질문) 간화선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나?

아잔간하 = 선불교 이야기는 오래전부터 들어 왔는데 관심이 없다. 지난 30여 년간 거기에 관심을 둔 적이 없다. 법은 상좌부나 대승에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 안에 있다. 우리가 마음챙김과 지혜만 있다면 선불교나 상좌불교나 상관없이 다 진리에 들어간다.

혜국스님 = 눈에 보이는 것, 귀에 들리는 것, 생각하는 것, 일체가 환영(幻影)인 줄 알고 마음챙김을 하고 관찰하는가? 환영을 인정하지 않고 마음을 챙기는 것인가? 환영인 줄 아는 ‘그놈’을 바로 보는 것이 간화선이고, 그 주시하는 자를 놓아두고 대상을 인정하는 것이 우리나라에서 행해지는 위파사나의 상당 부분이 그렇다. 본질을 보신 분 위치에서 어떻게 가르치고 있는가? 주시하는 것이 환영인줄 알고 관찰하도록 가르치는가, 아니면 환영인 것을 무시하는가.

아잔간하 = 자신의 몸과 자신의 말, 자신의 뜻 신구의(身口意)를 아는 것이다. 수행을 하면 지혜와 이해가 생긴다.

 icon_p.gif 

혜국스님

 

혜국스님 =

한국 스님들의 간화선 신심은 세계적이다. 흔히 간화선을 중국불교라고 이야기를 하는데, 그것은 법(法)을 모르는 사람이다. 부처님께서 “내가 깨달은 연기법은 과거에도 영원하고 미래에도 영원하다. 물론 공간도 없다”고 설했다. 그래서 중국선이다, 한국선이다, 남방이다, 일본이다(라고 구별하는) 그것은 부처님 법을 구속 시키는 것이다. 그렇기에 간화선이 실참(實參)되고 있고, 수행자는 거의 한국에 살아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언어를 떠난 세계, 생각이 일어나기 이전의 그러한 세계를 질문 드렸는데, (아간간하와 아잔브람이 답을 못할 분들이 아니라고 보는데) 문화의 차이 때문에 질문 자체가 전달이 안 되는 것 같다.

(청중 질문) 무아(無我)인데 어떻게 윤회(輪廻)하는가?

혜국스님 = 분명 무아이다. 왜 무아인가. 만약 나무 한그루, 풀 한포기가 주는 공기가 내 안에 안 들어오면 나는 죽는다. 여기에 못 온다. 물을 안 먹어도, 대지에서 나는 음식을 먹지 않아도 여기에 못 온다. 햇볕을 안 받아도 여기에 못 온다. 온 우주가 나와 하나가 되어 있는 것이지, 독립된 나는 없다. (그런 점에서) 분명히 무아이다. 그럼 누가 윤회를 하는가. 무아인줄 깨닫지 못하고 내 업을 따라가면 윤회이다. (그런데) 무아를 깨달으면 윤회라는 말은 없다, 윤회 안한다는 것이 아니고, 존재 자체가 된다.

아잔간하 = 내가 뭘 말해야 하는가. 자아(自我)가 없는데 무엇이 윤회를 하는가. 말로 계속하는 것은 유용하지 않다. 깊은 법은 말을 계속하면 사람들에게 혼란만 더 가중 시킨다. 그래서 수행을 통해 그것을 직접 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청중 질문) 간화선을 통해 깨치면 성불한다고 하는데 아라한과는 어떤 차이가 있나?

  아잔간하

아잔간하 =

아라한과 부처님의 사이에 번뇌와 욕망의 차이는 없다. 다만 과거부터 쌓아온 업의 차이가 있다. 아라한과 부처님은 서로 다른 바라밀을 닦았다.

혜국스님 = 문화의 차이인지 통역의 차이인지 모르겠지만 부처와 아라한은 꼭 같은데, 업(業)이 차이라고 했다. 그것은 업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아라한은 업이 없다. 그런 문제가 궁금하다. 언어의 차이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간화선에서 보면 일단 차제(次第, 순서)가 없다. 허공에는 높고 낮은 허공이 없다. 부처님은 공성(空性)이기에 도를 깨달으면 아라한이라는 것은 이름에 불과한 것이다. 깨달으면 똑같다. 차이가 없다.

(청중 질문) 지켜보는 자가 마음에 깨침을 이루는 것인가?

 icon_p.gif 

무차토론이 끝난 후 아잔브람(오른쪽)이 아잔간하에게 예를 올리고 있다.

 

아잔브람 =

아는 사람은 없지만 앎은 있다. 그래서 앎의 과정을 말하는 것이다. 앎의 행위가 이윽고 끝이 나면 멈춘다.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다. 그리고 다른 앎이 일어난다. 그리고 역시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다리 위에 서서 매일 강을 바라본다고 하자. 매일 같은 물처럼 보인다. 그런데 어제 있던 것은 오늘은 아무 것도 없다. 그래서 강물은 어떤 과정이지, 어떤 물체나 객체가 아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앎의 흐름’이라고 했다. 아는 자가 아니고 앎의 흐름이 있다고 했다. 흐름이 멈추면 앎이 멈춘다.

(기자 질문) 간화선이나 위빠사나에서 ‘내려놓음’을 말하는데, 내려 놓는 것 그 자체가 집착이 될 때 어찌해야 하는가

아잔브람 = 명상은 어떻게 하면 고요질 수 있나를 배우는 것이다. 그래서 생각이 없고,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다. (탁자에 있는 유리잔을 들어 보이며) 이 유리잔에 담긴 물을 고요하게 하겠다. 고요해 졌는가. 아마도 제가 집중하지 않아 그런 것 같다. 지금은 고요한가? 자 이제 알아차림과 마음챙김을 통해서 또 집중하겠다. 움직임을 멈추었는가?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명상하려고 한다. 그러면 집중할수록 더 많이 물이 흔들린다. 더 쉬운 방법이 있다. (탁자에 유리잔을 내려 놓으며) 내려 놓으면 된다. 이제 기다린다. 이것이 내려 놓는 방법이다. 계속 물잔을 들고 이제는 고요해졌나를 반복하는 수행자가 되지 말라. (탁자에 놓인 유리잔을 가리키며) 이제 잔잔한가. 이게 바로 내려놓는 방법이다. 단순하다. 아무것도 하지 말라.

혜국스님 = 사사건건 차이점만 말하는데 죄송하다. (하지만) 느낀 그대로 말하고자 한다. 내려 놓는다는 것을 물 컵을 비유로 들어서 했다. 하지만, 주로 우리의 생각, 즉 미운 생각, 원망하는 생각 등 내려 놓아야 할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런데 간화선에는 내려놓기 싫으면 내려놓지 말고 그냥 두라고 한다. 다만 그 내려 놓아야 할 마음, 그 마음이 나온 자리, 근본자리를 보여주는 게 화두이다. 그러니 화두만 챙기면 저절로 내려놓아 진다. 아니 이미 내려놓아 있다.

간화선이란 그렇게 하려면 화두를 완전히 내려놓은 상태, 일체 더 이상 내려놓은 게 없는 그 본질을 딱 보여준 그것이 믿음이 가면, 내려놓지 못해 고생하는 그 자리가 내가 화두 두는 순간 이미 내려놓아져 있구나, 내려 놓으려는 노력을 다시 기울이지 않고, 바로 공성(空性)으로 돌아가는게 내려 놓는 방법이다.

쉽게 말하면 내가 내려놓아야 할 내 단점과 내 못된 성질이 오늘날 까지 나를 지켜왔으니, 이 내려 놓아야할 성질을 공성으로 만들어보자, 부처로 한번 만들어보자, 모를 뿐인 화두로 돌아가는 것을 방하착((放下着)이라고 한다. 본래 없기에 한 생각만 돌리면 방하착이다. 화두 일념만 하라.

아잔브람 = 우리가 내려 놓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노력을 내려 놓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는 그것을 버리라는 것이다. 자기 의 자아가 있으면서 명상 하려고 노력할 때 항상 엉망이 된다. 우리가 사라져야 한다. 그러면 명상에서 일어나는 멋진 체험과 깨달음이 일어난다. 하지만 제가 그것을 일어나려고 할 때, 내려놓으려고 하는 그 자체를 내려 놓아라.

- (기자 질문, 아잔간하에게) 어떻게 한국에 오게 되었는가.

아잔간하 = 여러 번 요청이 있었다. 또 하나의 이유는 한국은 내가 존중하는 선진국이어서 불법(佛法)의 수행을 장려하고 싶어서다.

- (기자 질문, 아잔간하에게) 행복이 고통에서 온다고 했다. 어떻게 행복이 고통에서 오는가.

아잔간하 = 일단 고통이 일어나면 어떻게든 고통을 완화시킬 방법을 찾게 된다. 고통이라는 원인을 갖고 있는 사람은 법(法)의 수행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일상에서 항상 알아차림과 지혜를 수행해서 고통을 극복하려고 할 것이다. 알아차림과 지혜를 통해 일상에서 만나는 문제를 극복하고 그 원인을 볼 수 있다. (행사장 안에 있는) 모든 첨단 기기들이나 방송국 카메라나 에어컨도 모두 고통에서 나온 것이다. 여러분이 시원하거나 따뜻한 방에 앉아 이런 기기를 통해 법을 배우는 것은 불편한 환경이나 마음을 극복하기 위해 나온 것이다. 고통이 없었다면 현대도 삼성도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고통에 감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오늘날 한국 경제가 이렇게 되었겠는가.

- (기자 질문) 불교 수행의 입장에서 고통이란 실제하는가.

아잔브람 = 물론 고통은 존재한다. 고통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여러분은 여기에 오늘 없었을 것이다. 고통은 어리석음에서 야기된다. 여러분이 저희 절에 와서 수행한다면 무릎이 아프면 움직이면 된다. 마룻바닥에 앉을 수 없다면 의자에 앉으면 된다. 우리의 신체는 지금 직면한 고통보다 더 많은 고통을 더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런데 혜국스님이 말한 것처럼 굉장히 깊은 명상 상태에 들어가면 더 이상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 몸이 이윽고 사라져버린다. 우리는 더 이상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고, 냄새도 맡을 수 없다. 오직 남은 것은 마음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신체적 고통이 사라진다. 하지만 신체적 고통은 우리가 고통이라 부르는 것의 일부일 뿐이다. 정신적 고통도 있다. 사람들을 자살하게 만드는 것도 신체적 고통보다는 이런 정신적 고통이 더 크고 깊은 고통이기 때문이다. 정신적 고통에서 ‘놓아버림’은 효과가 있다. 그 방법을 배워야 한다.

혜국스님 = 어떨 때 고통을 느끼는가. 내 생각대로 안 될 때 느낀다. 내 생각이 하고 싶은대로 하면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 선방에서 가부좌 틀고 앉아 있으면 이 정도 시간은 편안하게 앉았을 텐데, 이런 의자에 앉아 있으니 내 궁둥이가 지금은 고통스럽다.

내 생각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 고통이 일어난다. 그럼 (간화선에서는) 그 고통을 느끼는 것이 내 생각, 내각 익힌 습관이냐, 아니면 내 마음이 고통을 느끼고 있느냐. 마음에는 고통이 없다. 고통을 느낄 줄 아는 놈은 누구냐, 그 고통 느낄 줄 아는 놈을 보여주는 게 화두이다. 고로 일체 일어나는 모든 고통은 내 생각대로 해 주지 않은데 대한 내가 일으킨 습관과 내 감정의 불만이다. 당연히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기에 그 고통을 느끼는 감정은 언제 내가 이겨내야 할 내 무거운 인생의 짐이다. 고통을 느낄 줄 아는 그 마음에는 고통이 없으니, 그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왜 ‘뜰앞에 잣나무’라 했을까. 모를 뿐, 오직 모를 뿐인 청정(淸淨). 순수 모를 뿐인 청정, 즉 화두 공성으로 들어가는 것을 우리는 고통에서 고통 없는 자리를 본다. 이렇게 본다.

-(기자 질문) 명상이 요즘 각광을 받고 있다. 개인이 고통에서 내려놓기 위해 (명상에) 집중한다고 본다. 나를 괴롭히는 상대방이 있을 때 내가 바뀌어야 한다고 하는데, 사회적 관계에서 고통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아잔브람 = 무언가 할 일이 있을 때는 내가 가진 모든 것을 거기에 투입해야만 하고, 내가 해줄 것이 없을 때는 그냥 내려 놓아라.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에 포위되었다 살아난 영국군 일화를 설명한 뒤) 첫 번째 상황에서 다수의 적군에 의해 포위됐을 때 싸운다는 것은 무리다. 그때가 바로 내려놓아야 할 때이다. 그리고 그 적군들이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즉 길이 열리기 시작했을 때는 우리가 무언가 할 수 있는 시기이다.

삶을 살아가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가 있다. 그럴 때는 그냥 차 한잔을 마셔야 한다. 그런데 내가 무언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거나 틈이 생겼을 때는 모든 것을 다 주어야 한다. 현대인들은 대체로 기다리거나 내려놓거나 놓아버리는 것을 모른다. 삶의 성공은 이 두 가지 기술이 다 필요하다.

<기사 이어집니다>

댓글
주제와 무관한 댓글, 악플은 삭제될 수 있습니다.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