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s | 불교진흥원-불교신문 ‘신년대법회’ 세상을 위한 불교 E-GREEN BUDDHA의 세계로...불교신문 10. 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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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관리자 작성일10-02-08 13:48 조회2,876회 댓글0건페이지주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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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일 열린 신년대법회에서 조계종 원로의원 정무스님은 효 사상과 불교가 세계를 이끌 키워드가 될 것이라고 법문했다.
“효행 실천하고 … 사고 전환하고 … 명상수행 하길”
대한불교진흥원과 본지는 지난 1일부터 서울 마포 다보빌딩 3층 대법당에서 ‘경인년 신년 대법회 및 강연회’를 열었다. ‘세상을 위한 불교, E-GREEN BUDDHA의 세계로’를 주제로 오는 11일까지 열리는 법회에서는 모두 9명의 출.재가 선지식들이 등장해, 불교가 세상을 위해 나가야 할 방향을 제시한다. 그 가운데 조계종 원로의원 정무스님(2월2일), 해남 미황사 주지 금강스님(2월3일), 전 동화사 승가대학장 지운스님(2월4일)의 강연 내용을 정리했다. 본지는 강연 내용을 차례대로 요약 정리해 세 차례에 걸쳐 연재한다.
조계종 원로의원 정무스님
인생이 무엇인가. 모른다 하는 것이 정답으로 가는 길이다. 의심으로 가는 것이 정답으로 가는 것이다. 이것이 참선이요 화두 드는 것이다.
싯다르타 태자는 생노병사가 두려워 왕궁을 탈출했다. 오늘날 심리학에서는 싯다르타 태자가 깨달음을 얻은 것은 과거 현재 미래 그 누구도 못한다고 한다. 그렇다고 할 필요가 없다고 할 것인가. 행불(行佛)하자.
부처님이 행한 데로 따르면 된다. 헛수고할 필요가 없다. 행불해서 성불하자. 본래 모두 부처님이다. 부처님 전법대로 살면 된다.
만선의 기본은 바로 ‘孝’
인생은 어디로 왔다가 가는가. 인생은 은혜와 원수라는 두 가지 빚을 갚으러 왔다. 은인과 원수가 따로 있지 않고 한 나무에 있다. 오늘날 인류 역사와 서구 종교는 원수를 갚기 위해 싸워왔다. 그러면 원수를 갚았는가? 3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면 인류는 자멸하게 돼 있다. 부처님 법 아니고서는 원수도 은혜도 갚지 못한다.
<부모은중경>에서 부처님은 전생에 부모 아닌 자가 하나도 없다고 말씀했다. 자신의 부모를 보는 눈으로 중생을 똑같이 봐야 보살(불자)이라고 설했다.
불교는 다섯 가지 은혜를 마음에 새겨 잊으면 안 된다고 말한다. 오종대은(五種大恩) 명심불망(銘心不忘). 은혜 갚는 자를 불자라 한다. 또 부처님은 만일 이 세상에 부처님이 안 계시면 부모님을 잘 섬겨라, 그것이 부처님을 섬기는 것이라 말씀했다.
효행은 만선(萬善)의 기본이다. 천지신명을 잘 모셔도 부모님 섬기는 것보다 못하다. 최상의 착한 것 가운데 효도가 으뜸이요, 세상에서 최고 악한 것은 불효다.
은혜 갚는 법에 상 중 하, 3종류가 있다. 그 가운데 하품 효도는 잘 먹이고 잘 입히는 것이다. 중품 효도는 부모님의 거룩한 뜻을 존경하고 경청해 배우고 공부하는 것이다.
상품 효도는 나쁜 부모를 개과천선 시켜 어리석음을 깨닫게 하고 즐겁게 만들어주는 것이다. 참 어려운 문제다. 죽음을 각오하고 해야 하는 것이다.
세계 석학들은 불교와 효 사상에 대해 극찬하고 있다. 독일 철학자 하버마스는 ‘한민족은 발달모델을 굳이 서구에서 찾을 필요가 없다.
불교와 유교라는 풍부한 문화유산을 삶과 조화시키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안타까운 일’이라고 말했다. 프랑스 문명비평가 기 소르망은 ‘21세기 한국의 상징은 불교’라고 했다. 아인슈타인은 ‘서구종교는 예나 지금이나 갈등관계지만 불교는 조화를 이룬다. 그래서 불교를 우주종교라고 하자’고 주장했다.
부처님 정법 따라 살길
지난해 5월15일 UN본부에서 반기문 총장과 20개 국가대표 등 500명이 모여 부처님오신날 봉축행사를 열었다. 반기문 사무총장이 불교신자이기 때문에 열릴 수 있었던 것이 결코 아니다. 과거 인류의 역사와 종교로는 살아남지 못하는 세상이 됐다. 불교라야 살 수 있다.
올해는 용맹한 기상이 있는 호랑이해다. 엄살떨지 말고 불끈 일어나 부처님 정법에 따라 용감하게 살자.
해남 미황사 주지 금강스님
석가모니 부처님은 ‘누구에게나 깨달음의 성품이 있다’는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발견을 했다. 이를 어떻게 하면 사람들에게 전달할 수 있을까. 3조 승찬스님은 <신심명>에서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다. 오직 간택함만을 꺼릴 뿐이다’라고 말씀했다. 우리는 늘 일상생활에서 구분하고 산다. 구분을 통해 배우고 경험하는 것을 쌓는다. 책을 보고 학교에서 배우며 오늘도 잘 살고 지혜롭게 사는 방법을 찾고 있다. 지적 능력과 경험을 쌓으면 쌓을수록 분별의 깊이는 더해간다.
‘평화’ 찾으려면 무념해야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돌보고 사랑하는 것들을 생각하지 않고 삶을 어떻게 지속시킬 것인가. 대전환이 이뤄져야 한다. 우리가 가진 지적능력과 경험만을 의지해 판단하고 살면 죽음과 증오가 되풀이된다. 이런 사고를 늘려가서는 안 된다. 그동안 보물처럼 여기던 시각을 버리면 깨달음의 성품이 드러난다.
<육조단경>을 보면, 무념.무상.무주가 나온다. 다른 말로 하면 평화로움, 행복함, 자유로움이다. 이는 우리가 늘 추구하는 것들이다. 평화로움을 찾으려면 무념해야 한다. 무념은 생각이 없는 것이 아니라 망상 즉 쓸데없는 생각이 없는 것이다. 망상이 없으면 마음이 고요하다. 망상이 없으면 누구를 만나든지 어떤 일을 하든지 늘 평화롭게 된다.
행복함은 무상이다. 고정된 상이 없는 것이다. 각자는 사람을 볼 때마다 고정된 상이 있어 기대감을 갖는다. 기대감이 충족되지 않으면 불만스럽고 괴롭다. 고정된 상이 없으면 행복하다. 존재 자체만으로 기쁘다. 상이 있어서는 다른 사람과 소통할 수 없다. 사람에게만 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나무, 동물, 지구까지도 포함된다.
진정한 자유로움은 무주해야 한다. 어느 곳에 있든지 머물지 않아야 한다. 친구에게 도움을 주고, 도와줬다는 마음에 머물러 있으면, 친구가 서운하게 했을 때 화내고 분노하게 된다. 얽매이면 자유롭지 못하다. 행위를 했다는 것은 구속시키는 것이다. 소통할 수 없고 함께 할 수 없게 된다. 집착 없이 객관적으로 바라봐야 한다.
함께하는 삶으로 바꿔야
수행해야 한다. 문제는 다른 곳에 있지 않고 바로 자신에게 있다. 깊은 수행 속에서 자기 사고를 전환시키는 수행방법이 있다. 또 법문을 통해 무념, 무상, 무주하는 방법을 배워 늘 생활 속에 적용시키면 깨달음의 상태와 같게 된다. 매순간 생활 속 지표로 삼고 생활화하면 사람뿐 아니라 자연, 생명 있는 것과 함께 할 수 있다.
함께 하는 삶으로 바꾸자. 나와 남을 구분하는 삶이 아니라 함께 하는 삶으로, 내 경험과 지식으로 평가하는 사고가 아니라 무념.무상.무주로 사고를 전환시켜 수행을 하는 삶으로 살아가자. 부처님 가르침을 통해 평화롭고 행복한 삶으로 바꿔나가고, 항상 소통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삶이 바로 세상을 위해 나가는 불교적인 삶이 아니겠는가.
前 동화사 승가대학장 지운스님
불교가 세상을 위한 종교가 아니라면 불교는 이 지상에서 사라졌을 것이다. 부처님도 제자들에게 중생의 행복을 위해 떠나라고 말씀했다. 세상을 위한다는 것은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중생을 위한다는 것이다. 중생을 위한다는 것은 곧 중생의 안락과 행복을 누림을 의미한다. 그것은 모든 생명에게 해당한다. 부처님은 그래서 모든 생명을 위해 가르침을 펴신 것이다.
세상의 가장 큰 이슈는 경제와 환경문제다. 이를 잘 들여다보면 인간의 탐욕으로 비롯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 명상이 모든 것을 치유한다.
세상의 문제, 탐욕서 비롯
몸과 마음, 환경까지 치유할 수 있다. 불교사상 가운데 유식을 보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와 우주는 마음의 투영에 지나지 않으며, 마음의 표현이라고 말한다. 이 세상을 알려면 마음을 들여다보면 된다. 세상이 행복하다면 이런 법회는 열릴 필요가 없을 것이다. 세계는 행복하지 못하다. 자연 재해나 전쟁 등이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우리 마음 씀씀이와 관계있다고 한다면 생각이 달라질 것이다.
부처님은 우리가 사는 세계를 ‘중중무진법계’라고 말씀했다. 마치 꽃잎이 중첩돼 있는 것 같이 거듭거듭 다함이 없는 세계를 말한다. 분리돼 있지 않은 세계다. 요즘 보면 부처님 말씀과 같은 일들이 많이 생기고 있다.
인터넷이 그렇고, 우리 인체의 신경 구조가 그렇다. 세계도 인체도 모두 연결망으로 돼 있는데, 정작 우리의 마음 씀은 그렇지 못하다. 모든 것을 분리시켜 본다. 이분법적 사고에 물들어 있다.
바깥에 있는 것이 스스로 존재한다고 본다. 사실 그런 것은 없다. 관계망으로 이뤄져 있는 것이다. 관계망으로 이뤄져 있으므로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 상호의존성과 관계성으로 보는 눈이 필요하다.
분별하기에 앞서 법문을 듣고 원인과 조건을 분석할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한다. 몸과 마음이 일어나는 일을 관찰하면 진실을 알게 된다.
진실을 알면 마음이 바뀌게 된다. 마음이 바뀌어 일상생활에 돌아와 마음을 바르게 쓰면 환경도 친환경적으로 변한다. 누가 변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친환경으로, 친생태계로 변한다. 그러면 환경과 생태계를 제대로 볼 수 있는 눈이 생기고, 사회와 우주를 제대로 볼 수 있는 눈이 생긴다.
결론적으로 명상해야 한다. 명상은 궁극적인 것을 바로 보는 방법이다. 그 방법에서는 도덕성(계)을 바탕으로, 선정과 지혜를 얻어야 한다.
깨달음은 무엇인가. 선정과 지혜가 완벽하게 하모니를 이룰 때 얻을 수 있다. 대승의 깨달음은 하나 더 있다. 자비다. 대승에서는 지혜와 자비가 하나가 될 때 정각을 이룬다 한다. 가장 좋은 방법은 베푸는 것이다.
심신치유 통해 행복해지길
명상이야말로 모든 것을 치유하는 궁극적인 방법이다. 몸과 마음이 치유되면 마음과 마음이 교류하는 사회가 치유되고, 자연이 치유되는 것이다.
5분도 좋고 10분도 좋고 매일 명상을 해야 한다. 법의 기쁨, 진리의 기쁨이 생긴다. 모든 것이 밝아진다. 저절로 감사하고 고맙다는 마음이 생기고 사랑한다는 말이 나올 것이다. 세상이 행복해지는 것이다.
정리=김하영 기자 hykim@ibulgy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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