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s | 벽안의 탱화장 브라이언 베리...법보신문 10. 4.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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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관리자 작성일10-04-19 17:05 조회3,129회 댓글0건페이지주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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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나’를 찾아 탱화 속으로 걸어 들어가다
“그냥 확 땡겨서 한국에 눌러 앉은 게 벌써 40년이여. 참 거시기 허지.”
“내 나이? 내가 해방둥이여. 긍께 올해 나이가 쉰 열 여섯(66)이제.”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리투아니아에서 열리는 한국탱화 전시회에 보낼 ‘호림산신도(湖林山神圖)’를 들고 나타난 벽안의 탱화장 브라이언 베리(BRIAN BARRY)의 한국말, 특히 전라도 사투리는 거침이 없었다. 아일랜드계 3세로 미국에서 태어나 전라도 사투리를 ‘부안 표준어’라고 우기는 그는 탱화의 거장 만봉 스님의 유작을 완성하는 일을 맡았다. 그 정도로 뛰어난 능력을 갖고 있다.
어디 그뿐인가. 지난 2월에는 법정 스님의 수필 중 외국인들에게 도움이 될 에세이 65편을 뽑아 『The sound of water, The sound of wind(물소리 바람소리)』로 펴내기도 했다. 그는 1986년부터 수행의 방편으로 탱화를 그리는 한편 성철·일타·법정 스님의 책을 영어로 펴내 외국인들에게 알리고, 조계종 국제포교사 양성에 기여하면서 이미 한국불교계에서 없어서는 안될 보배가 됐다.
하지만 그의 삶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미국 코네티컷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한 그는 1967년 12월 스물 세 살에 평화봉사단 일원으로 한국을 찾아 전북 부안군 변산반도에 첫 발을 디뎠다. 그러나 낯선 이국 땅에서 2년간 봉사활동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간 그는 견딜 수 없는 고통에 시달렸다.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일에 집중할 수가 없었고 자신을 자식처럼 아끼고 정을 주던 변산 하숙집 아주머니의 얼굴이 지워지지 않았다. 또 톡 쏘는 홍어 냄새와 혼을 울리는 듯 하던 꽹과리 소리 역시 귓가를 떠나지 않았다. 한국과 변산반도에 대한 그리움은 마치 떠나온 고향을 그리는 향수병과도 같았다.
봉원사 만봉 스님 문하에서 수학
눈 푸른 산신과 호랑이가 그려진 호림산신도.그렇게 한국을 그리워하고 있을 무렵, 평화봉사단으로부터 ‘다시 한국에 갈 생각이 있느냐’는 연락을 받았다. 앞 뒤 잴 것도 없이 한국행을 결정했다. “이유가 어딨어. 그냥 확 땡겨부렀어. 정말로 한국에 다시 오고싶어서 환장하겠는걸 어떡해.” 그렇게 다시 찾은 한국에서 다양한 문화를 접하며 점점 더 한국의 깊은 맛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그 길로 한국에 눌러 앉았다. 하지만 현실적 문제가 그를 압박했다. 영어강사와 번역 일을 했으나 경제적 어려움이 따랐고, 무엇보다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살아가고 있는지 삶에 대한 확신이 생기지 않았다. ‘나는 누구인가’를 찾는 정신적 방황의 시작이었다.
그런데 불상 앞에 앉아 있는 꿈을 자주 꾸던 1979년 어느 날 우연히 조계사 앞을 지나던 중 무엇에 이끌리기라도 한 듯 발길이 저절로 법당으로 향했다. 그렇게 법당 끝자리에 엉거주춤 앉아 무심히 있을 때였다. 자신은 가만히 앉아 있고 법당도 그대로인데, 법당 문 창살에 비친 그림자가 스스로 자리를 옮겨가는 모습을 보면서 순간적으로 “아!”하는 탄식과 함께 “바로 이거다!”라는 믿음이 생겼다. 불교에서 고민을 해결 할 수 있을 것이란 믿음이었다.
불교에 귀의하겠다는 원을 세운 가피였을까. 얼마 지나지 않아 대우그룹에서 일하게 되었고, 1998년까지 20년 동안 그 일을 할 수 있었다. 그처럼 우연한 기회에 불교와 연을 맺은 그는 1980년 ‘참 나’를 찾아 대원불교대학에서 불교공부를 시작했고, 1986년 삶을 완전히 바꿔놓는 인연을 만났다.
한국의 단청을 연구하러 온 미국 건축가의 통역을 맡아 찾았던 서울 신촌 봉원사에서 만봉 스님을 만났고, 그 자리에서 만봉 스님의 탱화를 보고 심장이 멎는 듯한 충격에 빠졌다. 비록 아버지의 반대로 미술학도의 꿈을 접고 정치학을 전공했으나, 어려서부터 미술에 심취했던 그에게 만봉 스님의 탱화는 잃어버린 열정을 되살리는 촉매가 되었다.
그날 스님에게서 ‘화실로 찾아와도 좋다’는 허락을 받고는 다음날부터 매일 만봉 화실을 찾았다. 하지만 탱화를 배우는 과정은 결코 쉬운 여정이 아니었다. 스님의 문하에 들기 위해서는 탱화의 밑그림인 시왕초(十王草) 3000장을 그려야 했으나, 그 과정이 너무나 힘들어 몇 번이나 보따리를 쌌다. 하지만 결국은 다시 화실을 찾았고 2년만에 시왕초 3000장을 완성, 만봉 스님 문하에서 정식 수학하는 전수자가 될 수 있었다.
탱화를 그리는 일은 오롯이 수행의 과정이었다. 밑그림 위에 안료를 칠한 후 말리기와 색칠을 수 차례 반복해야만 깊이 있고 살아 있는 색깔이 나왔다. 뿐만 아니다. 등장하는 보살과 동자 수 또한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가로 1.5m 세로 1.5m의 탱화 한 폭을 그리는데 두 달이 족히 걸리는 작업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구도자의 마음을 갖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지인들에게 부안 부씨로 불리는 벽안의 탱화장이 쓰는 사투리 때문에 생긴 웃지 못할 일도 적지 않았다. 1999년 태국 왕실사원의 부탁을 받아 탱화를 그릴 때, CNN 인터뷰를 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인터뷰 도중 ‘거시기’를 얼마나 많이 찾았던지 미국에서 방송을 본 형님이 전화를 걸어서는 “인터뷰 잘 봤다. 그런데 그 절 이름이 혹시 ‘거시기’냐?”고 묻는 일도 있었다.
그는 만봉 스님 입적 후 유작의 완성을 맡았을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고 있지만 때에 따라선 과감하게 고정관념을 벗어 던진다. ‘호림산신도(湖林山神圖)’의 산신과 호랑이 눈이 파란 것도 그런 경우다. 리투아니아 사람의 90% 정도가 파란 눈을 갖고 있는데서 착안한 결과다.
그런 그가 한국불교의 보배가 된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한국불교의 세계화에 발 벗고 나섰기 때문이다.
광덕 스님으로부터 ‘도해(道海)’라는 법명을 받은 그는 1987년 조계종에서 첫 번째로 서양인 포교사가 됐고, 그 인연으로 연등국제불교회관 설립에 참여했다. 이후 그 인연이 또다른 인연을 낳아 성철 스님의 『자기를 바로 봅시다』, 『이뭣고』를 영어로 번역 출간했고, 2009년에는 일타 스님의 책을 법보시용 『생활 속의 기도법』으로 펴냈다. 2월에 펴낸 법정 스님의 책은 2003년 번역을 마치고 스님이 직접 서문을 쓰기로 했었으나 ‘궁합이 맞는 출판사’를 찾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면서 결국 스님의 서문이 실리지 못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서양인 포교사 1호…선승들 책 영역 출판
법정 스님의 수필을 추려 영역한 책.그리고 세계적으로 알려진 『한국의 불화』 전 40권 영역도 그의 손에서 이뤄졌다. 이처럼 불교문화, 곧 한국의 문화를 해외에 널리 알린 공로를 인정받아 지난해에는 문화체육관광부로부터 훈장을 받기도 했다.
그런 그에게 2001년 생애 최대의 고비가 찾아왔다. 폐와 신장에 암이 생긴 것이다. 하지만 그는 네 번의 수술을 받으면서도 암을 병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암을 부처님으로 섬기고 치료를 수행의 과정으로 생각했다. 탱화를 그리는 일을 못할까 싶어 결혼까지 포기한 그에게 탱화는 그저 기능이 아니라 수행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냥 확 땡겨서 눌러앉은 한국에서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의문 때문에 방황하던 시절, 조계사 법당에서 문 창살 그림자를 보며 ‘무상’을 알아 불법에 대한 믿음을 갖고, 결국 탱화에서 화두를 풀어낸 셈이다. 브라이언 베리에게 있어서 탱화 그리는 일은 물론 밥 먹고, 잠자고, 아픈 것까지 모두가 수행일 뿐이다.
심정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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